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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단편집

하나부동산중개공인중개사 2013. 12. 9. 22:55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단편집

저자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지음
출판사
지식을만드는지식(지만지) | 2012-05-2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 책 소개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사상적 흐름을 읽을 수 있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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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타가와 류노스케라는 이름은 어디서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우연히 일본 애니메이션 중에서 푸른 문학이라고 하여 일본 근대문학가들의 작품을 인용하여 만든 작품이 있었다. 그때 말로만 들었던 나츠메 소세키, 다자이 오사무의 이름을 처음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과 <달려라 멜로스>를 필두로 나츠메 소세키의 <마음>이란 작품을 먼저 애니메이션으로 보고, 추후에 그것에 관계되는 소설을 직접 찾아 보았다. 여기서 나츠메 소세키의 <마음>과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읽어보았고, 소설에서 보던 것과 애니메이션에서 보는 것에 대해 서로 비교하면서 문자서사와 영상서사가 가진 독특한 맛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푸른 문학 시리즈에서 지옥변이란 단편짜리 작품으로 보았다. 그리고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다자이 오사무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과 이번에 읽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단편집을 읽으면서 그가 나츠메 소세키에게 인정을 받은 문학가란 점에서도 놀라웠다. 가라타니 고진이란 인물이 근대사회에서 벗어나 현대사회로 들어가는 일본에서 가라타니 고진이 대표적인 문화평론가라면 그 이전에는 나츠메 소세키인 것으로 알았다. 나츠메 소세키는 문학가로서 혹은 문학비평가로서 큰 역량을 보여준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 나츠메 소세키가 인정한 작가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란 인물이 그것도 애니메이션 지옥변으로 알았던 작가를 책으로 본다는 것은 매우 신기했다. 이번에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단편집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푸른 문학의 <지옥변>이란 작품을 보았다. 조금 내용을 다르고 상황도 다르지만, 히데요시라는 화가가 등장하고, 마지막에 그의 딸이 불에 타서 죽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작품을 원작대로 만든 게 아니라 각본과정에서 조금 수정한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거의 작품과 비슷하게 만든 것은 <인간실격> 정도이고, 나츠메 소세키의 <마음>은 아주 극히 일부분만 작품으로 만든 것이었다.

 

어째든 <지옥변>을 보면서 느낀 것은 애니메이션에 화가가 매우 예술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현실에 대해 화려한 것을 보는 게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진실을 보고 있었다. 군주는 매우 아름다운 것만 좋아하여 그 아름다운 것에 방해하거나 자신의 미학에 어울리지 않으면 모두 제거하는 인간이었다. 흔히 말하여 폭군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것은 폭군이라고 보기에 너무 신화적인 존재였다. 우리는 그 군주에 대해 책임을 돌리나 그 군주 자체가 우리 인간의 대표적인 관념적 한계성을 형이하학적으로 이미지로 생성된 것이다. 자신이 즐기는 배에서 어부들의 배가 부딪히니 그들을 그대로 참수하는 것도 모자라, 마을에 병이 들자 모두 불태워 죽인다.

 

심지어 병사는 자신의 아이가 집에 갇혀 있어서 구해달란 한 중년의 여성을 칼로 베어댄다. 아름다운 것이 있다면 분명 아름답지 못한 것이 있는 것은 필연지사다. 소설에선 그런 애니메이션 설정과 달리 군주는 매우 훌륭한 인물로 표현하고 있는데, 혹은 아니라면 그의 인품을 두고 역설적으로 보이려고 한 것이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히데요시에게 딸이 하나 있으니 그녀는 매우 수려한 용모에 인성도 훌륭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큰 인망을 얻고 있다. 단지 아쉬운 점은 아버지 히데요시와 같이 사는 것이 아니라 성의 시녀로 살아가고 있으며, 아버지 히데요시나 딸 모두 성에서 나와 같이 살기를 바란 것이다.

 

그녀는 효심도 지극한 것도 중요했다. 히데요시는 성격이 괴팍한 만큼 외모도 좋지 않았다. 진짜 원숭이를 성에 들여 그 원숭이의 이름을 히데요시라고 붙여 그 화가인 히데요시를 놀리려고 한 것이 그 성의 분위기였다. 하지만 딸이 원숭이를 길들이고, 게다가 주변에 칭찬받을 만큼 잘 지내게 하자 이제 원숭이는 히데요시가 아니라 원숭이 히데가 되었다. 그런 그녀에게 많은 사람들이 좋은 마음이 있다면 불온한 마음도 있다. 서술자인 나라는 존재가 밤에 성안을 도는데, 원숭이 히데가 이상한 반응을 보이고, 게다가 히데요시의 딸이 크게 당황한 모습을 본 것이다. 군주가 히데요시의 딸을 범하려고 했으나 실패한 것이다.

 

그런 와중에 임금은 히데요시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그림 지옥변을 그리라고 하는 명을 내린다. 히데요시는 그 명을 받들어 제자들에게 온갖 해괴한 요구를 하고, 그 모습을 보고 그림을 그린다. 그것도 모자라 사용하지 않은 성에 귀족의 여성이 불타는 모습을 그리고 싶다고 한다. 그 그림에서 아름다운 피부가 불에 타서 뼈만 남고, 아름다운 그 검은 머리는 붉은 화염으로 휘날리는 모습을 말이다. 그리고 왕은 이상한 생각하는지 당일 그 요구를 받아들여 지옥변의 정점을 찍게 한다. 히데요시는 알고 있었을까? 딸이 비참하게 불에 타 죽는데, 그걸 보고 그림을 그린다. 겉으론 예술에 미쳐버린 화가처럼 보이나 그림이 완성되고 나서 그는 자살을 한다.

 

지옥 중에서 가장 끔직한 업화의 염화가 타오른 장면을 그리고 싶은 요시히데, 그는 그 지옥 같은 모습만큼은 보지 못하여 그릴 수가 없으나, 그 장면을 그린 것이다. 어떻게 보면 지옥이란 정말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으나, 작품을 보면 지옥은 이미 그 곳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옥변이란 그림은 지옥을 그린 그림이니 지옥을 안 보고 그린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나 이미 지옥은 있었다. 자신의 딸이 산 채로 불태워 고통스레 죽을 때 그것을 보는 아버지란 지옥은 곧 현실이었다.

 

작품 하나를 만들기 위해 자신의 사랑하는 딸을 희생하면서도 그림을 그린 아버지, 그의 모습은 너무 모순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화술은 당대 최고이기에 군주가 몇 번이나 그에게 상으로 무엇이 필요한가? 라는 질문에 그는 항상 딸과 함께 살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그런 그가 딸의 죽음을 두고 미치광이처럼 그림을 그려 지옥과 같은 그림을 그렸으니 참으로 허무하고도 비참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지옥변을 시작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은 허무주의적인 요소가 많다. 뭔가 아쉽다는 것보다 뭔가 하나가 아니 둘 이상이 빠진 기분이라고 할까? <무도회>에서 소녀 아키코는 키는 작으나 매우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아가씨였다.

 

그런 그녀가 세월이 지나 할머니가 되어 기차여행을 떠나고 있었다. 기차 안에서 아키코 어느 청년과 만나 어린 시절에 프랑스장교와 무도회에서 댄스를 즐기던 이야기를 했는데, 프랑스 장교의 이름은 쥘리앵 비오라고 하였으나, 그 청년은 그 장교가 국화부인을 저술한 로티라고 하였다. 그러자 아키코는 그저 ?리앵 비오라고 했다. 내용을 보면 시작과 달리 끝은 너무 허무하게 또는 어이없이 끝난다. 작품 마지막을 본다면 ?리앵 비오는 아키코와 지난 이야기를 소설을 내었는데, 본명이 아니라 비오라는 이름으로 냈기에 그 소설을 아직 아키코가 읽어보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도 해본다. 지옥변과 다르게 시작은 산뜻하고 뭔가 이야기가 새롭게 전개되려다가 위기나 절정도 없이 끝난 이야기는 소설의 전반적인 흐름을 깨는 기분이었다.

 

뭔가 특별하게 보이고 아름답게 보이려는 억지스러운 느낌보단 그저 그것을 해체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해보였다. 그런 점에서 뒤편에 나온 <갓파>는 모순과 풍자의 그 자체였다. 그래도 나름 소설의 맛이 느껴질 정도로 분량이 이번 단편집에서 가장 길었다. 어느 한 남자가 갓파를 만나 우연히 갓파나라에 가서 그곳에 겪은 일들을 기록하여 다시 인간계로 왔는데, 그 남자는 정신병원에 갇힌 사람이었다. 문제는 갓파들에 대한 기억이나 그들의 모습은 너무 명확하고, 그가 구사한 언어는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 갓파들의 언어이니 그가 이상하게도 갓파와 인간의 말을 둘 다 구사한 점에서 갓파나라에 안 갔다고 말하지 못하면서도 그가 있다고 여기는 것은 곧 다른 것들이었다.

 

남자는 병원에서 철학자 토크의 서적을 보면서 읽고 있다고 하나 그가 직접적으로 들고 있던 것은 전화번호부였다. 그러나 그 전화번호부를 보면서 “야자수 꽃봉오리나 대나무 속에 부처님은 일찍이 잠들어 계시네. 길가 메마른 무화과와 함께 그리스도도 이미 죽고 만 것 같네. 하지만 우리들은 쉬지 않으면 안 될 것이네. 예를 들면 연극의 배경 그림 앞에서도.”, 나름 허무주의와 실존주의적인 면이 보이기도 하나 그는 현실에서 보고 있는 것과 자신의 뇌 안에서 보고 있는 것이 달랐다. 예술이란 것은 삶을 광학적으로 보는 것인가? 미셀 푸코의 <광기의 역사>에서 본래 광인들이란 대현자이면서도 바보이면서도 예언가이면서도 예술가였다.

 

인간이 드러나지 못한 것들 드러내고, 인간이 알지 못한 것을 말하기도 했다. 정상적이지 않기에 정상적인 인간들이 가진 평범하고 일반적인 무지라는 지식적 한계를 벗어난 것이 광인이다. 그래서 남자는 시를 만들고, 계속 사유를 멈추지 않으려고 하지 않은가? 갓파의 세계에서 보낸 그는 갓파의 세계 역시 참혹한 냉정하여 다시 인간세계로 돌아오려 했으나, 인간세계에서는 미치광이 환자였다. 이성을 가지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공상의 세계가 좋은지 아니면 미치광이처럼 있어야 할 현실이 좋은 지에서 어디에도 낙원을 부여되지 않는구나 하는 회의적인 모습이 보였다.

 

출처 : 文化科學 속의 Sub-Culture
글쓴이 : rawls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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