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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927.07.24 ?일본의 근대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사망

하나부동산중개공인중개사 2013. 12. 9. 22:55

1927.07.24  일본의 근대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사망

 

 

 

 

 

 

 

 

 

 

일본의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은 1920년대에 큰 발자취를 남긴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기린 상이다. 아쿠타가와는 10여 년 동안 작가로 활동하면서 장편은 없었지만 150여 편의 단편 소설을 쓰는 등 왕성한 창작욕을 보였다. '코' '라쇼몽' 등 자연주의적인 작품으로 격찬을 받았으나 작품 속에는 불행을 겪은 작가 자신의 신경쇠약 적인 면모가 녹아 있다.

 

1892년에 태어난 아쿠타가와는 생후 8개월 만에 어머니가 정신병을 앓게 돼 외삼촌 집에서 자랐다. 선병질적이었던 그는 어머니의 광기가 유전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렸으며 당시 일본제국주의가 드리운 어두운 시대 상황과 사회 분위기로말미암아 염세적 회의주의에 빠져 지냈다. 또 성공한 작가였으면서도 이 무렵 태동한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적응하지 못해 초조감에 휩싸이기도 했다.

 

1914년 도쿄 제국대학 재학 시절 첫 작품 '노년'을 발표한 이후 치밀한 구성과 다양한 문체의 작품들로 주목받았으며 말기의 작품 '신기루'와 '톱니바퀴'는 그의 날카로운 신경을 소름 끼칠 정도로 묘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35세이던 1927년 오늘, '막연한 불안'이라는 표현이 들어 있는 유서를 남긴 채 수면제를 먹고 자살했다.

 

 

김지석 논설위원  /매일신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芥川龍之介, Akutagawa Ry?nosuke ] 가키,조코도 슈진

1892. 3. 1 도쿄[東京]~1927. 7. 24 도쿄.

일본의 소설가.

 

 

 

초기의 필명은 야나가와 류노스케[柳川隆之介]. 하이쿠[俳句] 시인으로서의 호는 가키[我鬼]. 도쿄 교바시[京橋]의 이리후네 정[入船町]에서 니바라 도시조[新原敏三]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용띠 해, 용의 달, 용의 날(辰年辰月辰時)에 태어났다고 하여 류노스케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생후 8개월경 어머니가 미쳤기 때문에 어머니의 친정 오빠인 아쿠타가와 미치아키[芥川道章]의 양자로 가게 되었다. 어머니의 광기가 유전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은 평생 그를 괴롭혔고 결국 그를 자살로 몰고간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양자로 간 집은 생활은 윤택하지 못했으나 문예를 사랑하는 분위기의 가정이었다. 덕분에 아쿠타가와는 어린시절부터 책이나 그림, 골동품을 친숙히 대할 수 있어 감수성 예민한 소년으로 자라게 되었다. 1913년 제1고등학교를 거쳐 도쿄제국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여 1916년 졸업했다. 재학중에 구메마사오[久米正雄], 기쿠치 간[菊池寬] 등과 함께 동인잡지〈신시초 新思潮〉(3·4차)를 펴냈고 1916년 동인잡지에 발표한 단편소설 〈코 鼻〉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격찬을 받음으로써 화려하게 문단에 등단했다. 〈코〉는 〈라쇼몬 羅生門〉(1915〉·〈고구마죽 芋粥〉(1916)·〈지옥변 地獄變〉(1918)·〈덤불숲 藪の中〉(1922) 등과 그가 애독한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말기의 설화문학인 〈곤자쿠모노가타리슈 今昔物語集〉 또는 〈우지슈이모노가타리 宇治拾遺物語〉에 바탕을 둔 것으로, 그의 재기 넘치는 재구성에 의해 인생에 대한 회의와 체념을 해학적으로 표현했다. 그의 초기 작품은 무대를 과거로 옮겨서 괴이한 사건을 소재로 삼는 경우가 많았지만, 거기에 반드시 근대적·심리적 해석을 가미하여 지극히 화려한 수사(修辭)와 함께 독자를 매료시켰다. 그밖에도 역사에서 제재를 취한 작품으로 그리스도교 문학의 문체를 구사한 〈수도자의 죽음 奉敎人の死〉(1918), 메이지[明治] 개화기의 번역체를 구사한 〈개화의 살인 開化の殺人〉(1918), 그리고 오시오 요시오[大石良雄], 다키자와 바킨[瀧澤馬琴], 마쓰오 바쇼[松尾芭蕉] 등 에도 시대[江戶時代]의 저명한 인물들에 초점을 맞추어 그 심리를 새로이 해석하고자 한 〈어느날의 오이시구라노스케 或る日の大石內藏助〉(1917)·〈게사쿠 잔마이 戱作三昧〉(1917) 등이 있다. 또한 대륙을 무대로 한 〈도요새 山?〉(1921)·〈추산도 秋山圖〉(1921) 등도 독서를 통해 얻은 소재를 토대로 한 작품으로 그의 재능을 엿보기에 충분한 수작이다.

 

자연주의 이래 일본 문학은 있는 그대로의 인생의 진실을 묘사한다는 미명 아래 허구세계의 구축을 도외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쿠타가와는 그의 자전소설적인 〈다이도지 신스케의 반생 大導寺信輔半生〉(1925)에서 밝히고 있듯이 "인생을 열기 위해서 길 가는 행인은 관찰하지 않았다. 오히려 행인을 관찰하기 위해서 책 속의 인생을 알려고 했다"고 했다. 그는 과거를 사랑했지만, 과거를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역사를 쓸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입장이었다. 〈게사쿠 잔마이〉는 〈핫켄덴 八犬傳〉의 작자 바킨[馬琴]의 심경을 빌려서 그 자신의 심경을 피력한 것으로, 목욕탕 속에서 사팔뜨기 남자가 "바킨은 자연 그대로의 인간을 그릴 수가 없다. 손끝의 잔재주나 어설픈 학문으로 작품을 날조하고 있다" 는 등의 독설을 퍼붓고 있는 것은 바로 자연주의 이래의 문단 통념 아래서 비평가들이 아쿠타가와에게 한 비판을 비유한 것이다. 그러나 아쿠타가와는 인간의 생생한 모습을 쓸 수 없어 역사로 도피한 것이 아니라 당시 문단의 통념이 추방해버린 상상력과 꿈을 되살려 장엄한 허구의 세계를 구축하려고 했던 것이다.

 

당시 자연주의의 주류를 이루었던 '있는 그대로 작가의 생을 묘사하는' 사소설(私小說)은 그의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의 심성은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대중 앞에 드러내보이는 것을 견딜 수 없는 수치로 여기게 했다. 오히려 자신을 감추고 세상을 비웃으며 산 듯이 여겨지는 에도 시대의 게사쿠 작가야말로 남모르는 선혈을 흘린 진정한 소설가라고 생각했다. 역사소설 외에 〈밀감 蜜柑〉(1919) 등 현대 생활에서 취재한 작품도 있지만 자연스런 문체를 개척하지 못했으며, 장편은 펴내지 못한 채 단편에만 그쳤다. 1923년 이후로는 사소설도 약간 시도했으나, 무덤에 던져지는 한 덩어리의 흙과 같은 인간의 절망적인 운명을 한탄한 〈한 덩어리의 흙 一塊の土〉(1924) 외에는 특기할 만한 것이 나오지 않았다. 이때부터 그는 서서히 죽음을 의식하게 되었고 신변의 여러 사건은 그를 심적으로 괴롭혀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 요양하기에 이르렀으며 신경쇠약으로 인한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당시의 〈점귀부 点鬼簿〉(1926)는 죽은 육친을 회상하며 자신의 죽음의 그림자를 감지하는 심경을 그렸으며, 〈겐카쿠 서재 玄鶴山房〉(1927)는 병상의 노인의 심경과 그의 죽음 뒤에 일어나는 주변인물들 사이의 파문을 그리고 있다. 〈신기루 蜃氣樓〉(1927)· 〈톱니바퀴 齒車〉(1927)는 병적인 그의 날카로운 신경을 그대로 묘사하여 소름끼칠 정도이다. 이들 작품은 작가가 자신의 정신착란 상태를 대중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으로, 문단의 극찬을 받았다. 사소설의 대가인 가사이 젠조[葛西善藏]가 〈톱니바퀴〉에 대해서 "그도 처음으로 소설을 썼다"라고 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마지막 해인 1927년에는 풍자소설 〈갓파 河童〉, 그리스도교에 관한 고찰 〈서방의 사람 西方の人〉, 자전적 소설 〈어떤 바보의 일생 或る阿?の一生〉 등 많은 작품을 썼다. 7월 24일 도쿄 다바타[田端]의 자택에서 수면제를 먹고 35세의 나이로 자살했다. 유서 〈어떤 옛 친구에게 보내는 수기 或る舊友に送る手記〉에는 자살하는 동기를 '막연한 불안'이라고 썼지만 그것은 육체적·생활적·문학적·사상적 요소가 복합된 불안으로 여겨진다. 그는 자연주의 이후의 다이쇼 기[大正期]의 작가 중 시대의 불안을 가장 명확하게 인식한 지식인으로서, 그의 작품은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는 요소를 갖고 있어 오늘날까지 생명력 있게 널리 읽히고 있다.

 

兪玉姬 글

 

 

/네이트 백과사전

 

 

 

 

 

 

 

 

 

 

 

출처 : 추억속으로
글쓴이 : 그림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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