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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570.12.08 퇴계 이황 세상 떠남

하나부동산중개공인중개사 2013. 12. 8. 15:01

1570.12.08(조선 선조 3)  퇴계 이황(1501-1570) 세상 떠남

 

 

 

 

 

 

 

 

1501.11.25  출생 :  http://blog.daum.net/gjkyemovie/11353900

 

 

 

 

 

 

조선 최고 유학자 퇴계 이황 사망(1570-12-08 음)-소년조선, 2008-12-08
http://kid.chosun.com/site/data/html_dir/2008/12/07/2008120700413.html

 

퇴계 이황 별세(1570-12-08)-동아일보, 2007-12-08
http://www.donga.com/fbin/moeum?n=dstory$c_134&a=v&l=0&id=200712080071

 

 

 

 

 




율곡 이이와 더불어 조선 성리학의 성인으로 추앙받았던 퇴계 이황이 1570년 12월 8일 세상을 떠났다.

34세에 벼슬길에 들어선 뒤 70세에 사망할 때까지 140여 차례 임명, 79번의 사퇴라는 기록이 말해 주듯이 그는 높은 학문과 청빈한 삶으로 나라의 신뢰를 받았다.

일반적으로 ‘퇴계’라는 인물은 ‘주리론’ ‘이기이원론()’ ‘성학십도’ 등의 이론과 저서 등으로 잘 알려진 성리학의 아이콘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실제로 그는 누구 못지않게 풍류를 즐기는 남자였다.

 

단양군수로 재직할 당시 단양팔경을 지정해 사람들이 풍광을 즐길 수 있도록 했으며, 다양한 산세 등을 기록해 어떻게 산을 오르면 좋은지에 대한 등산법을 남기기도 했다. 또한 “남녀간의 사랑은 비도 오고 바람이 부는 만물의 생성(‘퇴계언행록’)”이라는 ‘성리학적’으로 로맨틱한 발언도 남겼다.

퇴계가 즐긴 풍류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매화에 대한 사랑이다.

매화를 ‘매형()’ ‘매군()’으로 깍듯이 부르며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이는가 하면 도산서원 한구석에 심어진 매화에 꽃이 필 때면 달이 차도록 꽃나무 곁을 빙빙 돌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또한 병이 위독했을 때는 깨끗하지 못한 모습을 매화에게 보일 수 없다며 매화분을 다른 곳으로 옮기게 했다니 매화에 대한 그의 지극정성을 짐작할 만하다.

남다른 ‘매화사랑’은 그의 생애에 풋풋한 로맨스도 하나 남겼다.

48세에 단양군수로 부임한 그는 관기 두향을 만나게 된다. 관비였으나 총명한 데다 학문을 익힌 두향은 조선 최고의 학자였던 퇴계를 깊이 연모했으나 꼿꼿한 퇴계의 마음을 열기는 쉽지 않았다. 매개체가 된 것은 매화였다. 두향이 꽃 빛깔이 희면서도 푸른빛이 나는 진귀한 매화를 어렵게 구해 보내자 퇴계는 “나무야 못 받을 것 없지”라며 받아들여 동헌 앞에 심고 즐겼다. 두향과의 관계가 어디까지 발전했는지는 기록에서 찾아볼 수 없으나 9개월간의 임기를 마치고 풍기군수로 옮겨 갈 때 퇴계는 두향이 선물한 매화를 챙겨 갔다. 매화는 도산서원에 옮겨 심어졌다.

노년에 벼슬을 떠나 안동 도산서원에 머물던 퇴계는 서원 입구에 ‘절우사’라는 정자를 짓고 소나무, 대나무, 국화 등과 함께 매화를 심고 즐겼다. 세상을 떠난 12월 8일 아침, 퇴계가 남긴 유언은 “저 매화나무에 물을 주라” 였다고 한다.

최근 새로 나온 1000원권 지폐에는 퇴계의 얼굴과 더불어 도산서원과 매화나무가 담겨 있다. 푸르스름한 지폐에 인쇄된 매화나무는 마치 두향이 선물했다는 청매화를 연상케 한다.

/동아일보

 

 

이황 [ 李滉 ]

1501(연산군 7)∼1570(선조 3).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도(退陶)·도수(陶叟).

 

 

 

〔생 애〕

경상도 예안현(禮安縣) 온계리(溫溪里 :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좌찬성 식(埴)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생후 7개월에 아버지의 상(喪)을 당했으나, 현부인이었던 생모 박씨의 훈도 밑에서 총명한 자질을 키워 갔다.

 

12세에 작은아버지 우(堣)로부터 ≪논어≫를 배웠고, 14세 경부터 혼자 독서하기를 좋아해, 특히 도잠(陶潛)의 시를 사랑하고 그 사람됨을 흠모하였다. 18세에 지은 〈야당 野塘〉이라는 시는 그의 가장 대표적인 글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20세를 전후하여 ≪주역≫ 공부에 몰두한 탓에 건강을 해쳐서 그 뒤부터 다병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한다.

 

27세(1527)에 향시(鄕試)에서 진사시와 생원시 초시에 합격하고, 어머니의 소원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성균관에 들어가 다음해에 진사 회시에 급제하였다. 33세에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김인후(金麟厚)와 교유하고 ≪심경부주 心經附註≫를 입수, 크게 심취하였다.

 

이 해 귀향 도중 김안국(金安國)을 만나 성인군자에 관한 견문을 넓혔다. 34세(1534)에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 부정자(副正字)가 되면서 관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37세에 어머니 상을 당하자 향리에서 3년 간 복상했고, 39세에 홍문관수찬이 되었다가 곧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임명되었다.

 

중종 말년에 조정이 어지러워지매 먼저 낙향하는 친우 김인후를 한양에서 떠나 보냈다. 이 무렵부터 관계를 떠나 산림에 은퇴할 결의를 굳힌 듯, 43세이던 10월에 성균관사성으로 승진하자 성묘를 핑계삼아 사가를 청해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을사사화 후 병약함을 구실로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46세(1546)가 되던 해 고향인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의 동암(東巖)에 양진암(養眞庵)을 얽어서 산운야학(山雲野鶴)을 벗삼아 독서에 전념하는 구도 생활에 들어갔다. 이 때에 토계를 퇴계(退溪)라 개칭하고,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그 뒤에도 자주 임관의 명을 받아 영영 퇴거(退居)해 버릴 형편이 아님을 알고 부패하고 문란한 중앙의 관계에서 떠나고 싶어서 외직을 지망, 48세에 충청도 단양군수가 되었다. 그러나 곧 형이 충청감사가 되어 옴을 피해 봉임 전에 청해서 경상도 풍기군수로 전임하였다.

 

풍기군수 재임중 주자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부흥한 선례를 좇아서, 고려 말기 주자학의 선구자 안향(安珦)이 공부하던 땅에 전임 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扁額서적(書籍학전(學田)을 하사할 것을 감사를 통해 조정에 청원, 실현을 보게 되었다.

 

이것이 조선조 사액 서원(賜額書院)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 1년 후 퇴임하고, 어지러운 정계를 피해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寒棲庵)을 지어 다시금 구도 생활에 침잠하다가 52세(1552)에 성균관대사성의 명을 받아 취임하였다. 56세에 홍문관부제학, 58세에 공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여러 차례 고사하였다.

 

43세 이후 이 때까지 관직을 사퇴하였거나 임관에 응하지 않은 일이 20여 회에 이르렀다. 60세(1560)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이라 정했다. 이로부터 7년 간 서당에 기거하면서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들을 훈도하였다.

 

명종은 예(禮)를 두터이 해 자주 그에게 출사(出仕)를 종용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에 명종은 근신들과 함께 ‘초현부지탄(招賢不至嘆)’이라는 제목의 시를 짓고, 몰래 화공을 도산에 보내 그 풍경을 그리게 하였다.

 

그리고 그것에다 송인(宋寅)으로 하여금 도산기(陶山記) 및 도산잡영(陶山雜詠)을 써넣게 해 병풍을 만들어서, 그것을 통해 조석으로 이황을 흠모했다 한다. 그 뒤 친정(親政)하게 되자, 이황을 자헌대부(資憲大夫)·공조판서·대제학이라는 현직(顯職)에 임명, 자주 초빙했으나, 그는 그때마다 고사하고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67세 때 명나라 신제(新帝)의 사절이 오게 되매, 조정에서 이황의 내경(來京)을 간절히 바라 어쩔 수 없이 한양으로 갔다. 명종이 돌연 죽고 선조가 즉위해 그를 부왕의 행장수찬청당상경(行狀修撰廳堂上卿) 및 예조판서에 임명하였다. 하지만 신병 때문에 부득이 귀향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황의 성망(聲望)은 조야에 높아, 선조는 그를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우찬성에 임명, 간절히 초빙하였다. 그는 사퇴했지만 여러 차례의 돈독한 소명을 물리치기 어려워 마침내 68세의 노령에 대제학·지경연(知經筵)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무진육조소 戊辰六條疏〉를 올렸다.

 

선조는 이 소를 천고의 격언, 당금의 급무로서 한 순간도 잊지 않을 것을 맹약했다 한다. 그 뒤 이황은 선조에게 정이(程頤)의 〈사잠 四箴〉, ≪논어집주≫·≪주역≫, 장재(張載)의 〈서명 西銘〉 등의 온오(蘊奧)를 진강하였다.

 

노환 때문에 여러 차례 사직을 청원하면서 왕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서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 ≪성학십도 聖學十圖≫를 저술, 어린 국왕 선조에게 바쳤다. 이듬해 69세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번번히 환고향(還故鄕)을 간청해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환향 후 학구(學究)에 전심하였으나, 다음해 70세가 되던 11월 종가의 시제 때 무리를 해서인지 우환이 악화되었다.

 

그 달 8일 아침, 평소에 사랑하던 매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킨 후, 일으켜 달라 해 단정히 앉은 자세로 역책(易簀 : 학덕이 높은 사람의 죽음)하였다.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폐하여 애도하고,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영사를 추증하였다. 장사는 영의정의 예에 의하여 집행되었으나, 산소에는 유계(遺誡)대로 소자연석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 새긴 묘비만 세워졌다.

 

죽은 지 4년 만에 고향 사람들이 도산서당 뒤에 서원을 짓기 시작해 이듬해 낙성, 도산서원의 사액을 받았다. 그 이듬해 2월에 위패를 모셨고, 11월에는 문순(文純)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학 문〕

이황이 ≪주자대전≫을 입수한 것은 중종 38년, 즉 그의 43세 때였고, 이 ≪주자대전≫은 명나라 가정간본(嘉靖刊本)의 복각본(復刻本)이었다. 가정간본의 대본(臺本)은 송나라 때 간행된 것을 명나라 때 복간한 성화간본(成化刊本)의 수보본(修補本)이었다.

 

그가 ≪주자대전≫을 읽기 시작한 것은 풍기군수를 사퇴한 49세 이후의 일이었다. 이황은 이에 앞서 이미 ≪심경부주≫·≪태극도설≫·≪주역≫·≪논어집주≫ 등의 공부를 통해 주자학의 대강을 이해하고 있었으나, ≪주자대전≫을 완미(玩味)함으로써 그의 학문이 한결 심화되었고, 마침내 주희의 서한문의 초록과 주해에 힘을 기울였다.

 

그의 학문이 원숙하기 시작한 것은 50세 이후부터였다고 생각된다. 50세 이후의 학구 활동 가운데서 주요한 것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53세에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설 天命圖說〉을 개정하고 후서(後敍)를 썼으며, ≪연평답문 延平答問≫을 교정하고 후어 (後語)를 지었다.

 

54세에 노수신(盧守愼)의 〈숙흥야매잠주 夙興夜寐箴註〉에 관해 논술하였다. 56세에 향약을 기초, 57세에 ≪역학계몽전의 易學啓蒙傳疑≫를 완성, 58세에 ≪주자서절요≫ 및 ≪자성록≫을 거의 완결지어 그 서(序)를 썼다.

 

59세에 황중거(黃仲擧)에 답해 ≪백록동규집해 白鹿洞規集解≫에 관해 논의하였다. 또한 기대승(奇大升)과 더불어 사단칠정에 관한 질의응답을 하였고, 61세에 이언적(李彦迪)의 ≪태극문변 太極問辨≫을 읽고 크게 감동하였다.

 

62세에 ≪전도수언 傳道粹言≫을 교정하고 발문을 썼으며, 63세에 ≪송원이학통록 宋元理學通錄≫의 초고를 탈고해 그 서(序)를 썼다. 64세에 이구(李球)의 심무체용론(心無體用論)을 논박했고, 66세에 이언적의 유고를 정리, 행장을 썼고 ≪심경후론 心經後論≫을 지었다.

 

68세에 선조에게 〈무진육조소〉를 상서했으며, 〈사잠〉·≪논어집주≫·≪주역≫〈서명〉 등을 강의하였다. 또한 그간 학구의 만년의 결정체인 ≪성학십도≫를 저작, 왕에게 헌상하였다.

 

〈무진육조소〉의 내용은, 제1조 계통을 중히 여겨 백부인 선제(先帝) 명종에게 인효(仁孝)를 온전히 할 것, 제2조 시신(侍臣)·궁인의 참언(讖言)·간언(間言)을 두절하게 해 명종궁(明宗宮)과 선조궁(宣祖宮) 사이에 친교가 이루어지게 할 것,

 

제3조 성학(聖學)을 돈독히 존숭해 그것으로서 정치의 근본을 정립할 것, 제4조 인군(人君) 스스로가 모범적으로 도술(道術)을 밝힘으로써 인심을 광정(匡正)할 것, 제5조 군주가 대신에게 진심을 다해 접하고 대간(臺諫)을 잘 채용해 군주의 이목을 가리지 않게 할 것,

제6조 인주(人主)는 자기의 과실을 반성하고 자기의 정치를 수정해 하늘의 인애(仁愛)를 받을 것 등으로, 시무 6개 조를 극명하게 상주한 풍격(風格) 높은 명문이다.

 

≪성학십도≫는 제1도 태극도(太極圖), 제2도 서명도(西銘圖), 제3도 소학도(小學圖), 제4도 대학도(大學圖), 제5도 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 제6도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제7도 인설도(仁說圖), 제8도 심학도(心學圖), 제9도 경재잠도(敬齋箴圖), 제10도 숙흥야매잠도(夙興夜寐箴圖)와 도설(圖說)·제사(題辭)·규약 등 부수문(附隨文)으로 되어 있다.

 

제1도는 도와 도설이 모두 주돈이(周敦頤)의 저작이며, 제2도의 〈서명〉은 장재의 글이고, 도는 정복심(程復心)의 작품이다. 제3도의 제사는 주희의 말이고, 도는 ≪소학≫의 목록에 의한 이황의 작품이다. 제4도의 본문은 주희의 ≪대학경 大學經≫ 일장(章)이고, 도는 권근(權近)의 작품이다.

 

제5도의 규약은 주희의 글이고, 도는 이황의 작품이며, 제6도의 상도(上圖) 및 도설은 정복심의 저작이고 도는 이황의 작품이다. 제7도는 도 및 도설이 모두 주희의 저작이고, 제8도는 도 및 도설이 모두 정복심의 저작, 제9도에서 잠은 주희의 말이고 도는 왕백(王柏)의 작품이며, 제10도의 잠은 진백(陳柏)의 말이고, 도는 이황의 작품이다.

 

그러므로 제3·5·10도와 제6도의 중간 하도(下圖) 등 5개 처는 이황의 독자적인 작품이고, 나머지 17개 처는 상기한 선현들의 저작이다. 그러나 이들 유학 사상의 정수는 이황에 의해 독창적으로 배치되어 서로 유기적으로 관련됨으로써 생명 있는 전체적 체계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이황의 학문은 일대를 풍미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역사를 통해 영남을 배경으로 한 주리적(主理的)인 퇴계학파를 형성해 왔다. 그리고 도쿠가와(德川家康) 이래로 일본 유학의 기몬학파(崎門學派) 및 구마모토학파(熊本學派)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쳐 왔다.

또한, 개화기 중국의 정신적 지도자에게서도 크게 존숭을 받아,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3국의 도의철학(道義哲學)의 건설자이며 실천자였다고 볼 수 있다.

 

≪언행록≫에 의하면, 조목(趙穆)이 이덕홍(李德弘)에게 “퇴계선생에게는 성현이라 할 만 한 풍모가 있다.”고 했을 때, 덕홍은 “풍모만이 훌륭한 것이 아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리고 ≪언행통술 言行通述≫에서 정자중(鄭子中)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선생은 우리 나라에 성현의 도가 두절된 뒤에 탄생해, 스승 없이 초연히 도학을 회득(會得)하였다. 그 순수한 자질, 정치(精緻)한 견해, 홍의(弘毅)한 마음, 고명한 학(學)은 성현의 도를 일신에 계승했고, 그 언설(言說)은 백대(百代)의 후에까지 영향을 끼칠 것이며, 그 공적은 선성(先聖)에게 빛을 던져 선성의 학(學)을 후학의 사람들에게 베풀었다. 이러한 분은 우리 동방의 나라에서 오직 한 분뿐이다.”

 

위에서 밝힌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그가 제자들에게서 성현의 예우를 받는, 한국 유림에서 찬연히 빛나는 제일인자임을 엿볼 수 있게 된다.

 

〔계승·평가·연구〕

이황의 학풍을 따른 자는 당대의 유성룡(柳成龍정구(鄭逑김성일(金誠一)·조목·이덕홍·기대승·김부륜(金富倫)·금응협(琴應夾)·이산해(李山海정탁(鄭琢정유일(鄭惟一구봉령(具鳳齡조호익(曺好益황준량(黃俊良이정(李楨) 등등을 위시한 260여 인에 이르렀다.

 

나아가서 그는, 성혼(成渾정시한(丁時翰이현일(李玄逸이재(李栽이익(李瀷이상정(李象靖유치명(柳致明이진상(李震相곽종석(郭鍾錫이항로(李恒老유중교(柳重敎기정진(奇正鎭) 등등을 잇는 영남학파 및 친영남학파를 포괄한 주리파 철학을 형성하게 했으니, 이는 실로 한국 유학 사상의 일대장관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이익은 ≪이자수어 李子粹語≫를 찬술해 그에게 성인(聖人)의 칭호를 붙였고, 정약용(丁若鏞)은 〈도산사숙록 陶山私淑錄〉을 써서 그에 대한 흠모의 정을 술회하였다.

 

임진왜란 후 이황의 문집은 일본으로 반출되어 도쿠가와가 집정(執政)한 에도(江戶)시대에 그의 저술 11종 46권 45책이 일본각판으로 복간되어 일본 근세 유학의 개조(開祖) 후지와라(藤原惺窩) 이래로 이 나라 유학 사상의 주류인 기몬학파 및 구마모토 학파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고, 이황은 이 두 학파로부터 대대세세(代代世世)로 신명(神明)처럼 존숭을 받아 왔다.

 

기몬학파의 창시자 야마사키(山崎暗齋)는 그를 “주자의 직제자(直弟子)와 다름 없다.”며 ‘조선의 일인(一人)’이라 평가하였다. 그리고 그의 고제(高弟) 사토(佐藤直方)는 “그의 학식이 이룬 바는 크게 월등해 원명 제유(元明諸儒)의 유(類)가 아니다.”라고 찬양하였다.

 

이나바(稻葉默齋)는 ‘주자의 도통(道統)’에서 ‘주자 이래의 일인(一人)’이라고 존신(尊信)했으며, 구마모토 학파의 시조 오쓰카(大塚退野)는 “만약에 이 사람이 없었다면 주자의 미의(微意)는 불명해 속학(俗學)이 되어 버렸을 것이라 생각된다.”고 하였다.

 

도쿠가와 말기의 요코이(橫井小楠)는 그를 원·명시대를 통해 ‘고금절무(古今絶無)의 진유(眞儒)’라 절찬했고, 역시 이 계통에 속하는 막부(幕府) 말 메이지(明治)시대의 구스모토(楠本碩水)는 “명대의 대유(大儒) 설경헌(薛敬軒)·호경재(胡敬齋)와 명말청초의 육가서(陸稼書)·장양원(張楊園)과 비교하면 훨씬 탁월하다.”고 단언하였다.

 

마쓰다(松田甲)의 ≪일선사화 日鮮史話≫에 의하면, 요코이의 친구이자 제자로서 메이지 제일의 공신이며 교육 칙어(敎育勅語)의 기초자인 모토다(元田東野)는 “정주(程朱)의 학은 조선의 이퇴계(李退溪)에게 전해졌고, 타이야(退野) 선생이 그 소찬(所撰)의 ≪주자서절요≫를 읽고 초연히 얻은 바 있었으니, 내 지금 타이야의 학을 전해 이것을 금상황제(今上皇帝)에게 봉헌하였다”고 술회했다 한다.

 

뿐만 아니라, 1926년 중국의 북경(北京) 상덕여자대학(尙德女子大學)에서는 대학의 증축·확장기금에 충당하기 위해 ≪성학십도≫를 목판으로 복각(復刻)해 병풍을 만들어서 널리 반포(頒布)하였다.

 

이 때, 중국 개화기의 대표적인 사상가 량치차오(梁啓超)는 찬시(贊詩)를 써 그 제1연에서 “아득하셔라 이부자(李夫子) 님이시여”라며 거리낌없이 그를 성인이라 호칭하였다. 다음과 같은 조호익의 말은 이황의 학적 지위를 간결히 표현한 매우 적절한 평가라 볼 수 있다.

 

즉, “주자가 작고한 뒤……도(道)의 정맥은 이미 중국에서 두절되어 버렸다. 퇴계는 ……한결같이 성인의 학으로 나아가 순수하고 올바르게 주자의 도를 전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비교할 만한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이 만한 인물을 볼 수 없다. 실로 주자 이후의 제일인자이다.”

 

1609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고, 그 뒤 그를 주사(主祀)하거나 종사하는 서원은 전국 40여 개 처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의 위패가 있는 도산서원은 제5공화국 때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국비 보조로 크게 보수, 증축되어 우리 나라 유림의 정신적 고향으로서 성역화 되었다.

 

이황의 학덕은 그의 생시(生時)외 한·일 양국의 역사에서 크게 선양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 국제적 규모로 널리 부흥, 재검토되고 있다. 1970년 서울에 퇴계학연구원이 창립되었고, 1972년 퇴계 400주기 기념 논문집 ≪퇴계학연구≫가 간행되기 이전부터 발행된 계간 학술지 ≪퇴계학보≫는 2000년 3월 현재로 105집에 이르렀다.

 

경북대학교에 퇴계연구소가 부설되었는가 하면, 서울과 거의 같은 시기에 일본 동경에 이퇴계연구회가 설립되었다. 대만에도 국립사범대학 안에 퇴계학연구회가 부설되었고, 근래에는 미국의 워싱턴·뉴욕·하와이에 이퇴계연구회가 조직되었으며, 독일 함부르크 및 본에 퇴계학연구회가 생겼다.

 

1986년에는 단국대학교에서 퇴계 기념 중앙도서관이 낙성되어 그 안에 퇴계학연구소를 부설하였다. 또한, 국제퇴계학회가 창설되어 1976년 이래로 거의 해마다 한국·일본·대만·미국·독일·홍콩 등지에서 국제학술회의를 개최, 세계 각 국의 이 방면의 석학들이 회동해 주제 논문을 발표하며 진지한 토론을 거듭해 오고 있다.

 

≪참고문헌≫ 退溪全書
≪참고문헌≫ 陶山全書(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0)
≪참고문헌≫ 日本刻版 李退溪全集(退溪學硏究院, 1975)
≪참고문헌≫ 退溪의 生涯와 學問(李相殷, 瑞文堂, 1973)
≪참고문헌≫ 退溪의 生涯와 思想(柳正東, 博英社, 1974)
≪참고문헌≫ 退溪哲學의 硏究(尹絲淳, 高麗大學校 出版部, 1980)
≪참고문헌≫ 退栗性理學의 比較硏究(蔡茂松, 景仁文化社, 1982)
≪참고문헌≫ 李退溪哲學-그 深層硏究 및 理論-(全斗河, 國民大學校 出版部, 1987)
≪참고문헌≫ 退溪와 栗谷의 哲學(劉明鍾, 東亞大學校 出版部, 1987)
≪참고문헌≫ 李退溪-その行動と思想(阿部吉雄, 評論社, 1977)
≪참고문헌≫ 李退溪と敬の哲學(高橋進, 東京東洋書院, 1985)
≪참고문헌≫ 退溪書節要(張立文, 中國人民大學 出版社, 1989)
≪참고문헌≫ 李退溪와 그의 學說(李丙燾, 韓國學硏究叢書, 成進文化社, 1971)
≪참고문헌≫ 退溪의 敎育哲學(丁淳睦, 지식산업사, 1971)
≪참고문헌≫ 李滉-性理學의 眞髓-(朴鍾鴻, 韓國의 人間像 4, 新丘文化社, 1971)
≪참고문헌≫ 退溪의 詩歌文學硏究-短歌의 歌辭에 대하여-(李家源, 退溪學硏究, 1972)
≪참고문헌≫ 退溪先生과 奇高峯(李乙浩, 退溪學硏究, 1972)
≪참고문헌≫ 退溪의 敬思想(李楠永, 韓國人의 人間觀, 한국교육개발원, 1977)
≪참고문헌≫ 退溪哲學의 根本問題(柳承國, 退溪學報 19, 退溪學硏究院, 1978)
≪참고문헌≫ 儒敎의 憂患意識과 退溪의 敬(安炳周, 退溪學報 25, 退溪學硏究院, 1980)
≪참고문헌≫ 退溪先生의 人性論(裵宗鎬, 退溪學報 32, 退溪學硏究院, 1981)
≪참고문헌≫ 陶山十二曲攷(崔珍源, 陶山學報 7·8, 陶南學會, 1985)
≪참고문헌≫ 退溪의 家庭觀(琴章泰, 退溪學硏究 1, 檀國大學校 東洋學硏究所, 1987)
≪참고문헌≫ 退溪의 사상과 그 현대적 의미(金炯孝 外, 한국정신문화연구원,1997)
≪참고문헌≫ 퇴계학 연구논총(경북대학교, 1997)


 

/네이트 백과사전

 

 

 

 

 

 

 1. 조선의 대학자 퇴계 이황
   ○ 한글명 : 퇴계 이황 
   ○ 한자명 : 李滉
   ○ 호 : 퇴계(退溪)
   ○ 시호 : 문순공(文純公)
   ○ 출생지 : 예안
   ○ 본관 : 진성
   ○ 생몰년도 : 1501~1570


퇴계 이황은 한국의 대표적인 선비로,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공적인 도리와 개인의 이익에 대한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부조리의 사회였기 때문에 공의(公義)와 사리(私利)의 구별을 뚜렷이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따라서 그가 취할 수 있는 일은 정치현실에서 떠나 학문을 닦음으로써 도(道)를 전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은둔하고자 했던 그에게 끊임없이 관직이 권해졌고, 관직에 올랐다 물러나기를 여러 차례 한 끝에 결국 영원한 은둔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여 부패하고 문란한 중앙에서 벗어난 외직을 지망하였다. 그 후로도 번번히 관직을 사양하였고 69세가 되자 결국은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관직과 낙향을 번갈아 하던 그의 사상은 제자들에 의해 도산서원에서 계속 이어져 내려왔다.

 

 

1. 출생 : 퇴계의 성은 이, 이름은 황(李滉 : 1501~1570),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도옹(陶翁), 퇴도(退陶), 청량산인(淸凉山人) 등이며, 관향은 진보(眞寶)이다.
퇴계는 1501년(연산군 7년) 11월 25일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현 노송정 종택 태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진사 이식(李植)이고, 어머니는 의성 김씨와 춘천 박씨 두 분이다. 김씨는 잠, 하, 신담부인 등 2남 1녀를 두고 별세하였고, 재취로 들어온 박씨가 서린(일찍 죽음), 의, 해, 증, 황 등 5형제를 낳았는데 퇴계는 그 막내이다.

 

2. 초년기 : 출생에서 33세 때까지 유교경전을 연구하는데 열중하였던 수학기

 퇴계의 부친은 서당을 지어 교육을 해 보려던 뜻을 펴지 못한 채, 퇴계가 태어난지 7개월 만에 40세의 나이로 돌아가시고, 퇴계는 홀어머니 아래서 자라게 되었다. 부친이 돌아가시던 당시 맏형 한 분만 결혼하였을 뿐 다른 형제는 모두 어려서, 가족의 생계를 어머니가 홀로 농사와 누에치기로 이어가는 어려운 형편이었으나 어머니는 전처에서 난 자녀를 차별하지 않고 길렀다고 한다.
 퇴계가 "나에게 영향을 가장 많이 준 분은 어머니"라 할만큼 어머니는 "과부의 자식은 몇 백배 더 조신해야 한다."는 엄한 가법을 세워 자녀를 교육하였다.

 퇴계는 6살 때 이웃에 사는 노인에게 '천자문'을 배우는 것으로 학문을 시작했으며, 12살 때 병으로 휴직하고 집에 와 있던 숙부에게 '논어'를 배웠다. 13세와 15세 때에는 형과 사촌 자형을 따라 청량산에 가서 함께 독서할 만큼 성장하였고, 16세 때에는 사촌 동생과 친구를 데리고 천등산 봉정사에 들어가 독학하기도 하였다.17세 때 안동 부사로 재임 중이던 숙부가 별세하여 물을 곳도 없게 되어 스승 없이 대부분을 혼자 공부하였다. 그 때문에 퇴계는 글자 한 자도 놓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연구하게 되었고, 비록 옛 성현의 글이라도 의심을 가지고 파고들어 재해석하는 학문 방법을 개척하게 되었다. 19세 때 '성리대전'의 첫 권 '태극도설'과 마지막 권 '시·찬·함·명·부'의 두 권을 구해 읽고 나서는,"모르는 사이에 기쁨이 솟아나고 눈이 열렸는데, 오래 두고 익숙하게 읽으니 점차 의미를 알 게 되어 마치 들어가는 길을 얻은 것 같았다. 이 때부터 비로소 성리학의 체계를 친숙하게 알 게 되었다."고 하였다. 20세 때 용수사에서 먹고 자는 것도 잊고 '주역'을 연구하는데 몰두하여 건강을 해치게 되고, 이로 인해 평생 동안 몸이 마르고 쇠약해지는 병에 시달리게 되었다. 21세에 허씨 부인과 결혼하고 23세에 잠시 성균관에 유학하였고, 27세에 향시, 28세에 진사 회시, 32세에 문과 별시, 33세에 경상도 향시에 합격하였고, 수 개월간 다시 성균관에 유학하였다.


3. 중년기 : 34세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여 49세 때 풍기 군수를 사직하고 귀향할 때까지의 임관기

 퇴계는 34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로 벼슬을 시작하여 43세 때까지 대체로 순탄한 관료 생활을 보낸다. 그러나 이때에도 끊임없이 학문 연마에 정진하였다. 종3품인 성균과 대사성에 이른 43세의 퇴계는 이 때부터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갈 뜻을 품는다.
이 후 52세 때 까지 그는 세 차례나(43, 46, 50세) 귀향과 소환을 반복하면서 관료 생활에서 벗어나 야인 생활로 접어드는 일종의 과도기를 준비한다.

 퇴계는 외척의 권력 투쟁이 격심하였던 혼란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성실히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경적(經籍 : 옛날 성현(聖賢)들이 유교의 사상과 교리를 써 놓은 책)을 관장하고 글을 짓거나 임금의 질문에 대답하는 역할을 맡은 홍문관(弘文館)의 관직에 가장 오래 재직하였다. 45세 때 을묘사화(乙卯士禍)가 일어나 많은 선비들이 희생당하고, 그 자신도 한 때 파직당하였으나 복직되었다.

 46세 때 고향으로 돌아와 양진암을 짓고 호를 퇴계라 하며 벼슬에서 물러날 뜻을 굳힌 것으로 보이며, 외직을 구하여 단양군수(9개월)와 풍기군수(1년 2개월)로 나갔다가 끝내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특히 풍기 군수로 있을 때는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을 조정에 요청하여 소수서원이라는 최초의 사액을 받게 하였다.
그가 물러나기를 결심한 것은 당시 외척들이 권력을 독점하여 어지러운 정치적 상황 속에서, 벼슬에 나가 한 시대를 바로 잡는 일 보다 학문 연구와 교육을 통해 인간의 올바른 삶의 도리를 밝혀 후세를 위해 참다운 표준을 제시하는 데 그 자신의 역할이 자각하였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사생활에서도 불행한 일이 속출하여 27세에 허씨부인을 잃고, 30세에 권씨 부인과 재혼하였는데 46세 때 그 권씨부인마저 잃는다. 더구나 단양순수로 나가던 해(48세)에는 둘째 아들마저 잃는 슬픔을 겪는다. 50세 때에는 친형인 좌윤공 해를 사화의 격동 속에서 잃는다.


4. 만년기 : 50세~70세 때까지 임명과 사퇴를 반복하면서 고향에서 연구, 강의, 저술에 전념한 강학기

 퇴계는 50세 이후에는 고향의 한적한 시냇가에 한서암과 계상서당 및 도산서당을 세우고, 그의 학덕을 사모하여 모여드는 문인들을 가르치며 성리학의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물러난 후에도 조정에서는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 공조판서, 예조판서, 의정부 우찬성, 판중추부사 등 계속하여 높은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거듭 사직 상소를 올려 받지 않았으며 마지못해 잠시 나갔다가도 곧 사퇴하여 귀향하기를 반복하였다.

 끊임없이 사퇴하려는 퇴계의 뜻과 놓아주지 않으려는 임금의 뜻이 항상 교차하여 문서상의 임명과 사퇴가 계속된 것이 노년기의 특징이다. 이렇게 된 까닭은 건강이 좋지 않은 탓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소망이 벼슬에 있지 않고 학문에 있었기 때문이다.
퇴계의 중요한 저술 또한 주로 노년으로 접어드는 50대 이후에 이루어졌다. 그의 저술 가운데 천명도설(天命圖說 : 1553년)과 천명도설후서(天命圖說後敍 : 1553년),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 : 1527~1572)과의 8년 간에 걸친 사단칠정논변(四端七情 錄辨 : 1559~1566),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 1556), 자성록(自省錄 : 1558), 전습록논변(傳習錄錄辨 : 1566),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 : 1568), 성학십도(聖學十圖 : 1568) 등은 한국유학사상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대표적인 저술이다.
 60세에 도산서당을 지어 스스로 학문을 연구하고 후진을 인도하는데 힘썼는데 그의 강학은 사망하기 전달까지 계속되었다.


5. 사망

 선비의 품격은  생애를 마치는 죽음의 자리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퇴계는 70세 되던 1570년(선조 3년) 12월 8일 세상을 떠났다. 이에 앞서 그는 11월 초에 병환으로 강의를 그만두고 제자들을 돌려 보냈는데, 그 소식을 듣고 조목 들 몇 사람의 제자들이 찾아와 간병을 하였다.12월 3일 자제들에게 다른 사람들로부터 빌려온 서적들을 돌려보내게 하였으며, 12월 4일 조카에게 명하여 유서를 쓰게 하였다. 이 유서에는 1)조정에서 내려주는 예장을 사양할 것, 2)비석을 세우지 말고 조그마한 돌의 전면에다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 라고만 새기고, 그 후면에는 간단하게 고향과 조상의 내력, 뜻함과 행적을 쓰도록 당부하였다. 12월 5일 시신을 염습할 준비를 하도록 명하고, 12월 7일 제자 이덕홍에게 서적을 맡게 하였으며, 그 이튿날 세상을 떠났다

시대적 배경


1570년 11월 9일 종갓집 제사에 참석했다가 감기에 걸린 것이 악화되어 자리에 누었다.

5일에는 관을 짜라고 명하고, 8일 아침에 평소 사랑해 오던 매화 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저녁 5시경에 부축을 받아 일어나 앉은 채로 숨을 거두었다.

 

퇴계이황은 폭군으로 유명한 연산군이 통치하던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1501년)
이황은 1528년에 진사시에합격,1534년에 전시에서 장원으로 합격했고요. 그 시대에 급제한 사람은 벼슬에서 물러나 계신 정승이나 대감들을 찾아가 인사를 하는 것이 예의였습니다. 이황이 한참 나랏일을 하고 있었던 때는 중종 임금의 시대였어요. 퇴계는 나이가 들어서 벼슬을 쉬고 고향에서 지낸 적이 몇번 있지요.
그 때, 이황의 마을 뒷산에 나라의 재산인 잣나무 숲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을의 상민들이 잣이 익을 때까지 돌아가면서 순서대로 숲을 지키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때는 나라가 매우 어지러웠다고 하네요. 그래서 퇴계이황도 나쁜무리들의 표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관청에 있는 사또들도 모두 자신의 이익만 챙기려고 하는 탐관오리들이었습니다. 퇴계는 단양군수로 지내면서 [단양 산수기]라는 책을 만들었습니다. 그 책을 보면 그 시대의
백성들이 흉년과 돌림병에 시달렸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그리고 그 시대에 은어는 임금님만 드시는 생선으로써 함부로 잡지 못하게 되어있었다고 하네요. 그 시대에는 유명한 인물인 율곡 이이도 있었어요. 욜곡도
이황이 세운 도산서원에서 이황에게 배운 적이 있지요.
그리고 이황으로부터 배우기 위해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 중에 정인홍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황은 그 사람을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 후 정인홍은
벼슬을 얻어 나쁜 벼슬아치가 되었고 죄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퇴계는선조 임금의 시대인 1570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상

 

 퇴계는 16세기 중반에 주리적 이기이원론의 토대 위에서 기대승과의 4단7정론을 통하여 한국 성리학의 특징인 심성론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수양론의 실천방법을 정밀하게 규명함으로써, 조선시대 성리학의 기본 틀을 정립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1. 이기론
 퇴계의 사상은 정자, 주자의 입장을 바탕에 둔 정주학의 토대 위에서 세워졌다. 그리하여 정주 계통의 성리학설을 기본 입장으로 하여 퇴계는 이와 다른 이론이나 학설을 배척한다. 불교나 도교와 같은 다른 사상은 말할 것도 없고, 같은 성리학이라 하더라도 심학이라 불려지는 양명학이라든지, 서화담 계통의 기일원론, 나정암(나순흠이라고도 함, 명의 성리학자)의 주기설 및 오초려(오징이라고도 함, 원의 학자)의 주륙 절충적 견해 등을 배척한다. 그 중에서도 양명학과 화담계의 기일원론에 대한 배척이 가장 강력하다.


 퇴계는 양명학의 심즉리설과 지행합일설을 거경궁리론과 지행병진설로 조목 조목 반박하고, 화담의 기일원론을 이기이원론으로 반박한다. 결국 퇴계는 정주의 이기이원론만을 인정한다.

 

 2. 심성론(인성론)
 이처럼 퇴계는 정주의 입장을 자신의 학문적 토대로 하여 출발하였지만 깊이를 더하여 감에 따라 독자성을 띠게 되었고, 마침내 정주의 차원을 넘어서게 되었는데 그 좋은 예가 심성론 특히 사단칠정론이다.  퇴계는 기대승과의 4단7정론을 통하여 이기론의 이론을 심성 개념의 분석과 해명에 적용하여 한국 유학의 중요한 특징인 심성론(인성론)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와 같은 퇴계의 사상으로 인하여 한국 성리학은 강한 독자성을 지니고 발전하게 된다.
 

 3. 수양론
 퇴계의 학문정신은 이론적 정밀성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 완성을 추구하는 수양론으로 열려 있기 때문에, 인간의 심성을 살아 움직이는 현실 속에서 이해한다는데 중요한 특징이 있다. 퇴계의 수양론은 심(心)과 경(敬)의 두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심은 수양이 이루어지는 바탕이요, 경은 수양을 실천하는 방법이다. 퇴계의 학문적 관심은 항상 인간의 도덕적 자기완성을 추구하는 수양론으로 귀결되고 있으므로 이 '경'이야말로 퇴계 사상의 핵심이며, 퇴계가 존경받는 이유도 이러한 경의 태도를 한 평생 몸소 실천한 인격자이기 때문이다.

 

 문인 정유일은 퇴계의 이러한 학문과 사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선생의 학문은 오로지 정주를 표준으로 한다. 경과 의가 같이 지탱하고(경의협지, 敬義夾持), 지와 행이 함께 나아가며(지행병진, 知行幷進), 밖과 안이 한결 같고(표리여일, 表裏如一), 본과 말을 함께 하며(본말병거, 本末幷擧), 대원을 뚫어보고 대본을 심어 세운다(식립대본 植立大本), 그 이른 경지를 논한다면 우리 동방에는 오직 그 한 분 뿐이다.

 

업적

 

1. 공직자

① 깨끗한 청백리로서의 모습을 보여줌

② 백운동서원을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으로 만들었음

③ 79번이나 벼슬을 사퇴하여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의연한 모습을 보여줌

④ 경복궁의 기문과 상량문, 현판 글씨, 외교 문서 등을 작성하여 명성을 떨침


2. 교육자

① 서원건립에 힘써서 많은 서원의 기초를 마련하고 많은 제자를 양성함

② 과거시험준비나 출세를 하기 위한 학문 풍토를 개선함

③ 올바른 교육을 위하여 손수 교과서를 만들고 새로운 교육과정을 수립함

④ 학문하는 태도의 모범을 보이고 바람직한 선비상을 확립함

⑤ 제자를 사랑하는 올바른 스승상을 정립함


3. 문학자

① 2000편이 넘는 많은 시를 남김


4. 사상가

① 고봉 기대승과의 4단 7정에 관한 논쟁을 통하여 학문적 논쟁의 모범을 보여주고, 성리학의 심성론을 크게 발전시킴

② 수양론의 실천방법을 정밀하게 규명하여 조선시대 도학의 기본틀과 독자성을 정립함

③ 일본에 많은 영향을 줌

 


5. 생활인

① 예안향약 곧 향약입조 28조를 정하여 향촌의 풍속을 교화함

② 합리성을 존중하여 현실에 맞는 예법을 시행함

③ 한 평생 '경'의 태도를 실천하여 인격자의 모범을 보여줌

④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극진함

 

저서

 

 성학십도

 도산십이곡

 사문수간

 

퇴계 이황의 교훈/배울점

 

[1]공직자로서의 교훈/배울점
① 깨끗한 청백리로서의 모습을 보여줌
② 백운동서원을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으로 만들었음
③ 79번이나 벼슬을 사퇴하여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의연한 모습을 보여줌
④ 경복궁의 기문과 상량문, 현판 글씨, 외교 문서 등을 작성하여 명성을 떨침

 

[2]교육자로서의 교훈/배울점
① 서원건립에 힘써서 많은 서원의 기초를 마련하고 많은 제자를 양성함
② 과거시험준비나 출세를 하기 위한 학문 풍토를 개선함
③ 올바른 교육을 위하여 손수 교과서를 만들고 새로운 교육과정을 수립함
④ 학문하는 태도의 모범을 보이고 바람직한 선비상을 확립함
⑤ 제자를 사랑하는 올바른 스승상을 정립함

 

[3]문학자로서의 교훈/배울점
① 2000편이 넘는 많은 시를 남김

 

[4]사상가로서의 교훈/배울점
① 고봉 기대승과의 4단 7정에 관한 논쟁을 통하여 학문적 논쟁의 모범을 보여주고, 성리학의 심성론을 크게 발전시킴
② 수양론의 실천방법을 정밀하게 규명하여 조선시대 도학의 기본틀과 독자성을 정립함
③ 일본에 많은 영향을 줌

 

[5]생활인으로서의 교훈/배울점
① 예안향약 곧 향약입조 28조를 정하여 향촌의 풍속을 교화함
② 합리성을 존중하여 현실에 맞는 예법을 시행함
③ 한 평생 '경'의 태도를 실천하여 인격자의 모범을 보여줌
④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극진함

 

 

 

 

 

이황(李滉, 1501~1570)은 ‘동방의 주자’로 추앙되고 있다. 그는 고려말 유입된 성리학의 토착화에 한 획을 긋는 인물이며, 당대 사회 주도층으로 성장하고 있던 사림세력의 활동에 이론적 근거를 마련한 인물이다. 역사상 위대한 족적을 남긴 이황의 생애를 따라가 보자.

 

 

 

영원한 스승, 퇴계 이황

 

한국 역사상 많은 위대한 인물이 있었다. 한국인이 즐겨 부르는 가요 가운데 역사상 위대한 인물 100명을 대상으로 한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이라는 것이 있다. 한국을 빛낸 인물이 어찌 100명에 그치겠는가 마는, 저 멀리 단군에서부터 시작하여 현대 미술가인 이중섭까지 100명의 인물들을 간략하게 말하고 있는 이 노래를 부르면, 왠지 모르게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에 대하여 자부심이 들게 한다. 이 노래에서 이황은 “주리 이퇴계”라 하여 그가 주장한 성리설의 핵심인 주리설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현대인들은 주리설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이 노래를 입으로 흥얼흥얼하면서 퇴계 이황을 위대한 100인의 한 명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조선시대 지식인의 한 유형, 의리 탐구에 주력

 

조선시대에는 많은 지식인이 활동하였다. 물론 논자에 따라서 이견이 있을 수 있으나, 대략 이 시대 지식인은 3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한 분류는 학문에 침잠해 성현의 도를 추구하는데 주력했던 인물로, 대표적으로는 이황(李滉)과 이이(李珥)를 들 수 있다. 이들은 현실에 참여하기도 하였지만, 그보다는 성리학을 학문적 바탕으로 하여 내면 수양의 기초가 되는 심성의 탐구에 주력하였다.

 

다음으로는 의리의 실천에 주력했던 인물로, 대표적으로는 조식(曺植)과 송시열(宋時烈)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내면의 수양을 전제로 축적된 학문의 실천에 주력했던 인물들이었다. 마지막 부류로, 국가 경영의 경륜을 실천했던 인물들로, 조선 전기에 양성지(梁誠之)를 비롯해 김육(金堉) 등이 이에 해당된다. 이들은 실제 국가 경영의 현장에 참여, 경륜의 실천에 주력했던 인물들이다. 다만, 당대 지식인을 반드시 어느 한 부류에 속한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앞서 제시한 이이의 경우 의리의 추구에 주력하면서도 실제 국가 경영의 현장에 참여하며 자신의 경륜을 제시하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분류는 경향성의 파악을 위한 편의적인 것일 뿐이다. 이 같은 3가지 분류에서 이황은 첫 번째에 해당되는 인물로, 철저하게 의리의 탐구에 치중하였으며, 그의 주된 관심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철학적 해명이었다.

 

 

 

퇴계학의 완성 과정

 

경상도 예안 온계리에서 출생한 이황은, 12살이 되던 해에 숙부 이우로부터 [논어]를 배우기 시작하며 학문의 세계에 입문하였다. 이후 그는 [주역]에 한 때 몰입하기도 하였으나, 진사시에 합격한 뒤 성균관에 들어간 뒤에는 [심경부주]에 심취하였다. [심경부주]는 중국 송나라 때 학자인 진덕수(眞德秀)가 지은 [심경]에 정민정(程敏政)이 주석을 붙인 책으로, 인간의 마음 이해를 위한 성리학자의 필독서였다. [심경부주]에 대해서 당시 대부분 사람이 구두조차 떼지 못한 상황이었는데, 이황은 “문을 닫고 여러 달 연구한 끝에 대강을 이해할 수 있었다”([퇴계선생언행록])고 한다.

 

 

 

이후 이황은 홍문관수찬이나 성균관사성 등의 관직을 제수받기는 하였으나 출사하지 않고 더욱 학문에 침잠, 43살이 되어서는 주자학의 정수인 [주자대전]을 입수하였다. [주자대전]은 주자의 저술인 [근사록] 등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글이 망라된 것으로 주자학의 백미 중에 백미라 하겠다. [주자대전]을 통해 주자의 저술에 대한 완벽한 이해에 도달하였던 이황은 이후 성리학 관련 다양한 저술을 내놓은 한편 학문적으로 완숙기였던 59살 때에는 33살의 어린 기대승과 사단(四端: 仁․義․禮․智)과 칠정(七情: 喜․怒․哀․樂․愛․惡․欲)과 관련해서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논쟁을 거치는 과정에서 이황은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한편 비록 어린 나이이지만 기대승의 의견을 받아 자신의 견해를 수정하기도 하였다.

이황이 기대승의 서신에 대한 답한 글(퇴계집 권16). <출처: 한국고전번역원>

 

 

 

이황이 이처럼 마음이나 인간의 내면에 대한 철학적 해명에 관심을 둔 데에는 당대의 철학적 사조에서 영향받은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가오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려면 도덕성 회복이 선결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전제된 것이었다. 당대뿐 아니라 앞 시대 집권세력에 의해서 자행되던 정치 사회적 비리나 폐단을 목격한 상황에서 그가 제시한 해답이라 하겠다.

 

 

 

사림의 시대, 사회운영 원리를 제시

 

역사학계에서는 16세기 후반 이후의 시기를 사림의 시대라고 하고 있다. 사림이 정치나 사회 등 제 분야에서 주도층으로 등장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황은 바로 이런 사림의 시대에 국가나 사회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 하는 논리를 제공한 인물로, 그의 학문적 업적과 함께 주목되는 사실이다. 이황은 먼저 향촌의 안정이 필요하다는 인식하에 예안향약을 제정하였다. 예안향약은 그의 고향인 예안현 농민이 여러 가지 이유로 유망(流亡)함으로써 향촌사회가 피폐해짐을 목격하고 이를 해결하고자 제시한 것이었다.

 

 

 

[성학십도] 중 제1도 태극도.
<출처: 국가전자도서관>


예안향약을 통해서 이황은 농민의 유망을 막아 향촌사회를 안정화시키려고 하는 한편 그가 평생 공부했던 성리학의 사회윤리를 현실에 구현하려고 하였다. 예를 들어 부모에게 불손한 자를 극벌로 다스린다든지, 친척과 화목하지 못한 자를 중벌로 다스린다는 조항 등이 이에 해당된다.

 

이밖에도 그는 다가오는 사림의 시대를 주도할 사림의 육성에 치중하였는데, 이때 주목한 것이 서원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서원은 1543년(중종 38)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인데, 이 서원의 설립 당시 주된 기능은 고려시대 유학자로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인 안향(安珦)의 제향이었다. 그런데 이황은 1550년(명종 5) 풍기군수로 내려갔을 때, 백운동서원에 대해서 중앙에 건의하여 소수서원이라는 사액을 받는 한편 서원을 단지 제향하는 공간이 아닌 사림들이 학문을 연마하고 자기 수양을 하는 공간으로 규정하였다. 초기 서원이 중시했던 제향 기능을 부수적인 것으로 규정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황은 이를 계기로 서원보급운동에 주력하여 상당수의 서원 건립에 참여하는 활동을 하였다. 이황의 이런 활동을 통해서 이른바 조선 서원의 전형이 완성되었거니와, 이황은 서원을 통해서 다가오는 시대에 국가 경영이나 사회 운영을 주도할 사림들을 육성하려고 하였다.

 

한편 이황은 말년에 새롭게 왕위에 오른 선조에게 [성학십도]를 바쳤다. [성학십도]는 그림을 통해서 성리학의 정수를 표현한 것으로, 새롭게 왕위에 오른 선조에게 군주학인 성학(聖學)을 제시하였다. 선조가 유학에서 성인이라 말해지는 요순(堯舜)처럼 성인이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믿음이 바탕이 된 것이었다.

 

  

 

동방의 주자로 추앙

 

이황의 이상과 같은 학문적 또는 사회적 활동은 비리와 부패로 점철된 시대를 청산하고 도덕적으로 완성된 사림에 의해 주도되는 사회로 나아가려는 역사의 도도한 흐름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이황의 문인 조호익은 이황을 평하여, “실로 주자 이후의 제일인자”라고 하였다. 가히 ‘동방의 주자’라 할 만하다.

 

이황의 학문은 당대뿐 아니라 이후 조선 사회에서 상당한 파급력을 가지며 확산되면서 이른바 퇴계학파라는 조선조 학파의 큰 맥을 형성하였다. 비록 이후 시기 그의 문인이나 후학들이 정치적으로 당대 주도세력과 정치적 성향을 달리하여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으나, 그의 학문은 대부분 논자들이 성리학의 정수로 인정하였다.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이후 문집이 일본에 유입되어 일본내 주자학의 주류로 자리매김하였다. 오늘날 그에 대한 연구는 국내에 국한되지 않고 일본과 대만, 미국, 중국 등 국경을 초월해 이루어지고 있다. 아마도 그가 탐구하려고 하였던 큰 주제가 인간의 보편적 본성에 대한 것이기에, 시대와 국경을 초월해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라 하겠다.

 

 

 

 

 

이근호 / 국민대 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
글쓴이 이근호는 조선후기 정치사와 정치사상사 관련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또한 대중과 소통하려는 차원에서 [이야기 조선왕조사], [청소년을 위한 한국사사전] 등을 출간하였는데 이러한 노력은 계속될 것이다.

 

그림 장선환 /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화가와 그림책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출처 : 추억속으로
글쓴이 : 그림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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