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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863.12.08 강화도령…조선조 철종 승하

하나부동산중개공인중개사 2013. 12. 8. 15:02

1863.12.08  강화도령…조선조 철종 승하

 

 

 

 

 

 

 

 

 

 

 

 

[동아일보]

1863년 조선조 제25대 왕 철종이 승하했다. 본명 원범(元範)의 나이 33세. 재위 14년 만이었다.

그것은 조선왕조 오백년 사직이 명운을 다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비록 왕정(王政)은 이어졌으나 조선왕조실록은 마침내 대가 끊기고 말았다.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이 있지만 일제가 설치한 이왕직(李王職)에 의해 그들의 입맛대로 편찬됐을 뿐이다.

철종조에 이르러서는 왕통(王統)마저도 희미해져 갔다. 헌종이 숨지자 대왕대비 순원왕후는 왕가의 법도를 깡그리 무시하고 농투성이 ‘강화도령’을 임금으로 앉혔다. 순원왕후는 안동(安東) 김씨 일문(一門)의 좌장격인 김문근의 근친이었다.

정치적 배후가 없는 철종이야말로 안김의 세도정치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들은 서둘러 김문근의 딸을 철종의 비로 삼았다. 철종은 재위 내내 안김 일문의 ‘데릴사위’로 살아야 했다.

그러나 철종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온화한 농부의 천성을 타고났으며 검소했고 영민한 자질도 엿보였다. “내가 고기를 많이 먹으면 백성들이 본을 받아 가축들이 많이 상할까 저어된다.”

철종은 빈민 구제나 이재민 구휼에 남다른 열정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짧은 학문과 경륜에다 자격지심까지 겹쳐 세도정치를 혁파할 방도를 찾지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그는 점차 국사를 등한히 했다. 철종은 단명하기도 했지만 정치적으로 조로(早老)했다. 점차 여색에 빠져들었다. 그것은 권력의 탐닉(耽溺)이 아니라 권력으로부터의 도피였다. ‘바보 철종’은 안김의 강고한 세도 앞에서 살아남기 위한 정치적 선택이었다.

안김 일문은 왕족 중에도 그들에게 장애가 될 인물이 있으면 제거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왕실의 종친들에게 기개와 의분은 곧 죽음을 뜻하였다. 성군(聖君)의 자질과 품성은 정치적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철종은 후사를 두지 못했다. 철인왕후 김씨에게서 아들을 얻었으나 일찍 죽었고 후궁과 궁녀들에게서 얻은 아들 넷도 단명했다.

그렇게 조선 왕조는 씨가 말라 갔다.

 

 

 

철종 [ 哲宗 ]

1831(순조 31)∼1863(철종 14). 조선 제25대 왕. 재위 1849∼1863.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이름은 변(昪)이다. 초명은 원범(元範)이다. 자는 도승(道升), 호는 대용재(大勇齋)이다. 정조의 아우 은언군(恩彦君)의 손자이다. 전계대원군 광(全溪大院君饍)의 셋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용성부대부인(龍城府大夫人) 염씨(廉氏)이다.

 

당시 영조의 혈손으로는 헌종과 원범 두 사람뿐이었다. 1849년 6월 6일 헌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 : 純祖妃, 金祖淳의 딸)의 명으로 정조의 손자, 순조의 아들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 때 나이 19세였다.

 

학문과는 거리가 먼 농부로서, 1844년(헌종 10) 형 회평군 명(懷平君 明)의 옥사로 가족과 함께 강화도에 유배되어 있었다. 그런데 별안간 명을 받아 봉영의식(奉迎儀式)을 행한 뒤 6월 8일 덕완군(德完君)에 봉해졌다. 이어 이튿날인 6월 9일 창덕궁 희정당(熙政堂)에서 관례(冠禮)를 행한 뒤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하였다.

 

나이가 어리고 농사짓다가 갑자기 왕이 되었으므로 처음에는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1851년(철종 2) 9월에는 대왕대비의 근친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明純王后)로 맞았다. 그 뒤 김문근이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이 되어 왕비의 아버지로서 왕을 돕게 되니 순조 때부터 시작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또다시 계속된 셈이었다.

 

철종은 1852년부터 친정하였다. 이듬 해 봄에는 관서지방의 기근대책으로 선혜청전(宣惠廳錢) 5만 냥과 사역원삼포세(詞譯院蔘包稅) 6만 냥을 진대(賑貸)하게 하였다. 또 그 해 여름에 한재가 심한데도 재곡이 없어 구활하지 못하는 실정을 안타까이 여겨 재용(財用)의 절약과 탐묵(貪墨 : 욕심이 많고 비리를 저지름.)의 징벌을 엄명하였다.

 

1856년 봄에는 화재를 입은 여주의 민가 약 1,000호에 은자(銀子)와 단목(丹木)을 내려 주어 구활하게 하였다. 또한 함흥의 화재민에게도 3,000냥을 지급하였다. 이 해 7월에는 영남의 수재지역에 내탕금 2,000냥, 단목 2,000근, 호초(胡椒) 200근을 내려주어 구제하는 등 빈민구호책을 적극 실시하였다.

 

정치의 실권은 안동김씨의 일족이 좌우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삼정(三政 : 田政·軍政·還穀)의 문란이 더욱 심해지고 탐관오리가 횡행하여 백성들의 생활이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마침내 농민들은 마침내 1862년 봄 진주민란을 시발로 해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여러 곳에서 민란을 일으켰다.

 

이에 철종은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이라는 임시 특별기구를 설치해, 민란의 원인이 된 삼정의 폐해를 바로잡기 위한 정책을 세워 시행하게 하였다. 그리고 모든 관료에게는 그 방책을 강구해 올리게 하는 등 민란 수습에 힘썼다. 그러나 뿌리 깊은 세도의 굴레에 얽매여 제대로 정치를 펴 나갈 수 없었다.

 

이런 사회현상에서 최제우(崔濟愚)가 동학(東學)을 창도해 사상운동을 전개, 확산시키자 이를 탄압하였다. 교주 최제우는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인다.”는 죄를 씌워 처형하였다. 1863년 12월 8일 재위 14년 만에 33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수용(睟容 : 임금의 畵像) 4본이 천한전(天漢殿)에 봉안되었다.

 

혈육으로는 궁인 범씨(范氏) 소생의 영혜옹주(永惠翁主)가 있어 금릉위(錦陵尉) 박영효(朴泳孝)에게 출가했을 뿐 후사가 없었다. 시호는 희륜정극수덕순성문현무성헌인영효(熙倫正極粹德純聖文顯武成獻仁英孝)이다. 묘호는 철종(哲宗)이다. 능호는 예릉(睿陵)으로, 경기도 고양시 원당읍 원당리에 있다.

 

≪참고문헌≫ 憲宗實錄
≪참고문헌≫ 哲宗實錄
≪참고문헌≫ 高宗實錄
≪참고문헌≫ 璿源系譜記略

 


 

/네이트 백과사전

 

 

 

 

 

 

출처 : 추억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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