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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943.12.08 국어학자 이윤재 옥사

하나부동산중개공인중개사 2013. 12. 8. 15:05

 

1943.12.08  국어학자 이윤재 옥사

 

 

 

 

 

 

 

 

국어학자 이윤재 옥사(1943-12-08)-매일신문, 2008-12-08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56048&yy=2008

 

국어학자 이윤재 함흥 형무소에서 옥사(1943-12-08)-네이버뉴스, 2000-12-07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38&aid=0000038495

 

목숨바쳐 지킨 우리말을 함부로 쓰지 않나요?
한뫼 이윤재 선생 사망(1943.12.08)-코메디닷컴, 2011-12-08
http://www.kormedi.com/healthletter/popView.aspx?idx=744

 

 

 

 


국어학자 이윤재가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체포돼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갖은 고문으로 1943년 12월 8일 옥사했다. 조선어학회 사건은 일제가 조선학 연구의 탄압책으로 한글연구를 한 학자들을 민족의식을 고양시켰다는 죄목으로 탄압·투옥한 사건이다.


1888년 경상남도 김해에서 태어난 이윤재는 대구 계성학교에서 공부했다. 이후 평안북도 영변의 숭덕학교에서 교사로 재직 중에 3·1운동에 가담해 2년간 복역했다. 출옥 후 중국 베이징대학 사학과에서 수학하고 1924년 귀국해 중등학교에서 다시 교편을 잡았다. 그는 조선어학회 기관지인 '한글'을 창간, 편집을 주관했고 1934년에는 진단학회에 가입해 국사연구에도 참여했다.


1937년에는 흥사단 계열의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이듬해 11월까지 투옥되었다가 풀려나와 연희전문학교와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교수를 지냈다. 그는 국어학자들과 한글맞춤법을 제정하고 조선어사전을 편찬하는 등 한글 보급을 통한 민족운동에 몰두했다. 주요저서로는 '성웅 이순신', '문예독본' 등이 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이윤재[ 李允宰 ]

 

1888 경남 김해~1943 함흥.

국어학자.

 

 

호는 한뫼·한메·환산(桓山). 어렸을 때는 마을에서 한문을 익혔으며 김해 공립보통학교를 마치고 대구 계성학교와 대구 춘잠학교에서 공부했다. 보통학교 졸업 후에는 김해 협성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했고 계성·춘잠 학교를 마치고 마산의 창신학교·의신학교와 평안북도의 영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중국의 문물을 배워 우리 문화 발전의 밑거름으로 삼기 위해 1921~24년에 중국 베이징대학교 사학과에서 수학했다. 귀국 후에는 흥사단에 가입했고 서울 협성학교에서 교직에 몸담으면서 〈한빛〉을 창간하기도 했다. 1930년대 국어학계의 중추적 연구단체인 조선어학회의 주요인물이었던 그는 조선어사전 편찬위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맞춤법통일안 제정위원, 표준어 사정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어문 정리와 보급에 힘을 기울였고, 1932년에는 조선어학회 기관지 〈한글〉을 창간하여 편집을 주관했다. 1937~38년에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으며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1943년 옥사했다.

 

국어학자로서의 그의 업적은 맞춤법·사전편찬·문자사로 나누어 정리된다. 맞춤법에 관한 그의 이론은 대체로 1933년 조선어학회에서 발표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으로 이어진다. 그는 현재의 발음과 일치하지 않는 옛 표기를 버리고 실제의 발음대로 쓸 것을 주장하였는데 한자어에도 이러한 원칙을 적용했다. 모든 자음을 받침을 살려서 어법에 맞도록 쓸 것을 주장했으며, 된소리 표기법으로는 'ᄲ··ᄯ·ᄭ'처럼 된시옷을 사용하는 방법을 반대하고 각자병서로 적는 방법에 찬성했다. 용언의 불규칙 활용은 '덥고·더우니'처럼 그대로 표기에 반영해야 한다고 했다. 통일안 공포 이후에는 새 맞춤법의 보급을 위해 〈한글〉과 신문지상의 해설 강좌를 담당하기도 했다. 우리 민족의 어문 생활을 통일하기 위해 그 기준이 될 사전의 편찬이 시급히 요청되던 당시에 이윤재는 사전편찬 실무에 깊이 관여했다. 1927년 계명구락부(啓明俱樂部)에서 시도했던 국어사전 편찬 작업에 편찬위원으로 참여했으며, 1929년 한글날 기념식장에서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를 조직하여 편찬원으로 활동했다. 상하이[上海]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개인적으로 사전편찬을 준비하던 김두봉(金枓奉)을 찾아가기도 했다. 한편 1933년 겨울부터 그가 편찬을 시작하여 완성하지 못한 자료들을 모아 그의 제자이자 사위인 김병제(金炳濟)가 수정·증보하여 1947년 〈표준조선말사전〉을 간행했다. 이 사전은 아직 조선어학회의 사전이 나오기 전인 당시에 널리 이용되었다. 이윤재는 한글의 역사를 한글을 부르는 명칭에 따라 세종에서 성종 때까지의 정음시대, 연산군에서 갑오경장까지의 언문시대, 갑오경장에서 한일합병까지의 국문시대, 그 이후의 한글시대로 나누었는데 이러한 시대 구분은 뒤의 최현배방종현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네이트 백과사전

 

 

우리는 꼭 바라고 나아갈 희망 한 가지가 있다. 그를 여기에서 기다랗게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모를 리 없다. 이 희망만은 어느 때 까지든지 꼭 이루고야 말리라는 것까지도 잘 안다. 우리는 이 희망을 이루면 잘 살고, 이루지 못하면 잘 살지 못할 것까지도 안다.(…)오늘부터 우리가 전민족적으로 대방침을 세우고 대계획을 정하자. 그리하여 너니 나니 가리지 말고 오직 한 깃발 아래 모여서 저기 보이는 한 목표를 향하여 서로 손목 잡고 나아가자. 이것이 이 신년에 정할 조선 민족의 만전지계라 부르짖는다.

-1927년 선생이 신년의 희망을 밝힌 글 중에서([동광] 제9호, 1927. 1)

 

 

주시경 선생을 사숙하면서 한글 연구의 기초 닦아

 

 

한뫼 이윤재(李允宰, 1888. 12. 24∼1943. 12. 8) 선생은 경남 김해부 우부면 답곡리(현재 김해시 대성동)에서 태어났다. 선생의 본관은 광주(廣州), 호는 한뫼, 한메, 환산(桓山)이다. 6살 때인 1894년부터 선생은 향리의 서당에서 10여 년 동안 한학을 수학하였는데, 그 재주가 뛰어나 주위에서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시기 조국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았다. 일제는 러시아와 세력을 다투더니 결국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도발하였고, 곧이어 한국에 대한 일본의 독점적 지배권을 인정하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같은 국망의 상황을 선생은 외세에 대항할 민족의 실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인식하였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선생 혼자만의 것은 아니었고 이 시기 계몽운동을 전개하던 개화 지식인들이 갖고 있던 일반적인 사고였다. 때문에 그들은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여 일제에게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맹렬하게 계몽운동을 전개하여 갔다. 계몽운동은 언론, 정치, 사회단체, 종교 등 각 부문에서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중요시 되었던 분야는 민족교육이었다.


 

 

이러한 시대 분위기 속에서 선생 또한 늦은 나이에 김해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수학하였다. 그리고 1908년 졸업한 뒤에는 김해의 합성학교에 교사로 재직하며 당시의 민족적 과제인 국권회복을 달성하기 위해 교육계몽운동에 동참하였다. 아울러 대구에 있는 계성학교에서 고등과정을 이수하였는데, 이곳에서 선생은 우리말과 글, 그리고 우리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어 그 연구에 일생을 받치기로 결심한 듯싶다. 이에 따라 선생은 당시 한글의 권위자인 주시경을 사숙하면서 연구의 기초를 닦는 한편 1913년부터 마산의 창신학교에 봉직하면서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창신학교는 의열단 단장으로 명성을 날린 김원봉의 고모부인 황상규가 한말 민족교육을 위해 설립한 사립학교였다. 그리하여 한말에는 김원봉, 1910년대 초반에는 훗날 조선어학회의 장을 지낸 이극로가 수학하는 등 민족적 열기가 넘치던 학교였다. 선생은 이 학교에서, 그리고 1917년부터는 의신여학교에서 조선어를 가르쳤다. 더욱이 일제에 의해 조선사 교육이 금지된 상황에서도 암암리에 우리 역사를 교육하여 청년 학생들의 민족 정체성과 독립정신을 함양하여 갔다.

 

 

중국 망명 중 신채호에 영향 받고 북경대학에서 근대 역사학 공부

 

 

한편 선생은 3·1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 평안북도 영변의 숭덕학교에 재직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이 지방의 만세시위운동을 앞장서 계획하고 주도하였다. 이로 인해 선생은 일경에 체포되어 갖은 고초를 겪은 뒤, 그 해 7월 31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을 받고 평양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출옥 후 선생은 마산으로 돌아와 있다가 그 해 6월 중국으로 망명하여 북경에서 독립운동가들을 두루 만나 민족운동에 관한 의견을 들었다. 그 가운데 선생은 민족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우리 역사를 연구하던 민족주의 역사학자이자 절대독립론자인 신채호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 같다. 이에 따라 선생은 북경대학 사학과에 입학하였고, 여기에서 3년간 근대 역사학을 공부한 뒤 1924년 3월 졸업하였다. 북경대학에 수학 중에도 선생은 국내에서 최남선이 발행하던 잡지인 <동명>에 [중국의 새 문자], [몽고 민족의 독립운동], [중화민국 의회소사], [북경대학을 중심으로 한 학계와 정계와의 충돌], [경한철(京漢鐵)종업원 총동맹 파공(罷工)의 전말], [호적(胡適)씨의 건설적 문학혁명론], [민중 혁명화하는 중국의 학생운동] 등 주로 중국 현대사와 민중운동에 관한 글을 발표하였다. 이들 또한 민족의 주체를 민중으로 생각하여 민중의 직접혁명에 의한 민족독립을 주장하고 있던 신채호의 영향으로 생각된다.


북경대학을 졸업하고 1924년 9월 귀국한 선생은 곧 바로 정주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는데, 이것도 신채호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오산학교는 한말 신민회의 민족교육기관으로 이승훈에 의해 설립되어 평양의 대성학교와 함께 서북지방 독립운동의 요람으로 일컬어진 곳이다. 더구나 여기는 신채호가 만주로 망명하기 직전 재직하면서 민족교육을 실시하던 곳이었고, 이승훈은 신채호의 신민회 동지였다. 따라서 신채호는 북경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는 선생을 이승훈에게 소개하여 오산학교에서 민족교육에 앞장서게 한 것으로 이해된다. 오산학교에 근무하면서 선생은 수양동우회에 가입하여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26년 1월 수양동맹회와 동우구락부가 통합하여 조직된 수양동우회는 흥사단의 국내 지부와 같은 것이었다. 흥사단은 한말 양기탁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였던 안창호가 1913년 5월 미주에서 조직한 민족독립운동자의 인격수양 단체였다. 그리고 1926년 4월부터는 서울 협성학교로 옮겨 근무하면서 선생은 수양동우회의 기관지인 <동광>에 [쾌걸 안용복]을 발표하였다. 조선 숙종시대 일본 어민들을 물리치고 울릉도와 독도를 사수한 안용복의 활약상을 소개한 이 글은 선생의 의도가 어디에 있었는지 짐작이 간다.

 

 

 

조선어 사전 편찬의 핵심적 역할 수행

 

1927년 8월 선생은 “조선 사람에게는 조선말 사전 한 권도 없음”을 통탄하면서 조선어학회의 전신인 조선어연구회에 가입하여 조선어 사전 편찬 활동에 참여하여 갔다. 조선어연구회는 한말 학부대신 이재곤의 발의로 1907년 7월 학부 안에 설치되어 1909년 12월까지 활동하였던 국문연구소를 그 연원으로 한다. 국문연구소는 위원장 윤치오와 위원 주시경, 어윤적, 이능화, 권보상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이 중에서도 주시경의 역할이 특히 눈부셨다. 주시경은 한말 국망의 위기상황에서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나아가 이를 통하여 국권회복을 달성하려 했던 분이었다. 따라서 애당초 조선어의 연구와 그 성과의 보급은 민족운동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출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1910년 8월 우리나라가 일제의 완전 식민지가 되어 식민교육이 본격화함에 따라 우리말과 글에 대한 연구와 보급은 어렵게 되었다. 더욱이 1914년 주시경의 급서는 그 의지마저 꺾는 것이었다. 하지만 1920년대에 들어와 주시경의 제자들인 장지영, 권덕규, 이병기, 김윤경 등이 스승의 유지를 받들어 1921년 조선어연구회를 조직함으로써 상황은 호전되기 시작하였다. 이 연구회는 표면적으로는 ‘조선어의 정확한 법리(法理)를 연구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지만, 내면적으로는 우리말과 글의 보급을 통한 민족독립의 달성을 지향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연구회는 1927년 2월 <한글>이라고 하는 기관지를 창간하여 조선어 연구의 대중적 전파와 보급에 힘쓰는 한편, 조선어 사전 편찬 사업을 추진하였다. 사전 편찬 사업은 일찍이 1910년대 초 주시경과 김두봉을 중심으로 조선광문회에서 착수했다가 중단된 적이 있었는데, 이것이 이 때에 와서 다시 추진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선생은 조선어연구회에 가입한 후 동지들과 더불어 사전 편찬 사업에 적극 동참하여 갔다. 이 사업은 1929년 1월 독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새로 조선어연구회에 가입한 이극로와 선생을 비롯한 기존 회원들의 활약으로 일대 전기를 맞게 되었다. 즉 선생을 비롯한 회원들의 노력으로 “말은 민족의 단위를 결정하는 가장 큰 요소이고, 말의 단위가 곧 민족의 단위이므로 조선말이 곧 조선 겨레이다”고 하는 어문 민족주의적 인식이 확산된 것이다. 이에 기반하여 “조선문화의 쇠퇴와 민족의 낙오는 무엇보다도 조선어문의 불통일에서 기인되었다”고 하는 자성의 목소리가 커져 갔다. 그리하여 1929년 10월 각계의 저명 인사 108명은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는 우리말과 글의 정리와 통일은 단순한 어문의 통일만이 아니라 장래 민족의 독립을 기약하는 일이라는 인식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로써 이 위원회의 전폭적인 재정 지원으로 사전 편찬작업은 더욱 활기를 띠어 갔다. 이 같은 분위기를 조성한 데는 1927년 10월 3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한 선생의 [세종과 훈민정음], 그리고 1928년 5월 <별건곤>에 발표한 [세종성대의 문화] 등도 크게 작용하였다. 더구나 “조선 얼굴의 거울, 조선 마음의 거름”을 표방하면서 1928년 선생이 창간한 잡지 <한빛>의 영향도 도움이 되었다.

 

 

[한글맞춤법 통일안](1933). 조선어학회가 제정,
공표한 국어 정서법(正書法)의 체계로 선생이 원안 작성에 참여하였다.

 

 

국어와 사학 연구를 병행하고 학교에서는 조선어 강의에 힘써

 

사전 편찬 사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학술적 책임을 맡은 조선어연구회는 1931년 1월 조선어학회로 확대 발전하였는데, 이 때 선생은 상임감사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정인승, 이중화, 한징 등과 함께 사전 편찬 전임위원으로 선발되어 민족적 대사업의 완수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따라서 선생은 사전 편찬 사업과 함께 학회의 실무를 겸하는 등 양쪽 모두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더구나 선생은 이 시기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와 경신학교, 그리고 연희전문학교에서도 조선어를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에 1인 4역의 몫을 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31년 봄 선생은 상해로 가서 김두봉을 만나기도 하였다. 그것은 중국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혼자서 사전 편찬 사업을 진행하고 있던 김두봉을 초빙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현실 여건상 그의 초빙은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자문을 구하는데 만족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이제 사전 편찬은 조선어학회의 전담 사업이 되었다. 따라서 조선어학회는 사전 편찬을 위한 선행 사업으로 우선 어휘의 수집과 한글 맞춤법 통일, 표준어 사정, 외래어 표기법 제정 등의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와 함께 1931년부터 1934년까지 4년간 매년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조선어학회는 경향 각지에서 한글강습회를 개최하였는데, 단골 강사는 항상 선생이었다. 그리고 1932년 1월부터는 <한글>을 조선어학회 기관지로 복간하여 발행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여 갔는데, 이것도 선생이 편집 및 발행을 주관한 것이었다.

 

한편 선생은 이 같은 조선어학회의 사업만 아니라 한국사와 관련한 글을 지속적으로 발표하였다. 예컨대 선생은 1930년 3월부터 9월까지 <동아일보>에 28회에 걸쳐 [대성인 세종대왕]을, 10월부터 11월까지는 25회에 걸쳐 [성웅 이순신]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1931년 2월에는 <신생>에 [동방의 위인 이이 소전], 1931년 11월 <신동아>에 [충의 의인 민충정공]과 [강감찬의 귀주대첩과 권율의 행주대첩] 등을 연이어 발표하였다. 국난극복의 영웅들과 민족문화 창조의 위인들을 소개한 이 같은 글을 통해 선생은 당시 팽배하던 민족패배주의를 극복하고 민족독립의 희망을 주고자 한 것으로 이해된다.

 

 

 

식민사학에 대항하기 위해 진단학회 창립

 

특히 선생은 민족주의 역사학자로서도 일본인들의 식민사관에 의해 한국사가 왜곡되는 현실을 그대로 보아 넘길 수 없었다. 때문에 선생은 역사 및 한글 학자들과 함께 순수 학술단체로서 1934년 7월 진단학회를 창립하였다. 그리하여 소극적인 방법이었지만 실증적인 연구방법론으로 식민사학에 대항하면서 <진단학보>를 통해 회원들의 연구 성과를 발표함으로써 국학 발전을 이루어 갔다.

 

 

 

 

수양동우회사건으로 검거되었던 당시 이를 상소했던 재판 기록(1939년 1월 12일 경성복심법원), 재판은 기각되었고 선생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1년 6개월 동안 수감되어 갖은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1933년 10월 조선어학회는 드디어 사전 편찬을 위한 첫 작품을 내놓게 되었다. 선생을 비롯한 18명의 작성위원들이 여러 차례의 독회와 축조 심의 끝에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 발표한 것이었다. 이어 1936년 10월에는 서울의 중류사회에서 사용하는 말을 기준으로 표준말 사정 작업을 거쳐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완성하여 발표하였다. 이와 같은 작업을 진행하던 중 선생은 1937년 6월 수양동우회의 주요 인사들과 함께 일경에 피체되었다. 이는 1935년 2월 안창호의 가출옥 이후 점차 조직이 확대되고 민족성이 강화되고 있던 수양동우회를 무력화하기 위한 일제의 책략이었다. 또한 중일전쟁 도발을 앞둔 시점에서 이른바 ‘총후(銃後)의 안정’을 위해 일제가 자행한 민족운동 탄압책의 일환으로 보인다. 결국 1938년 3월 안창호의 순국 이후 수양동우회 인사들은 대부분 석방되기는 하였지만, 이 사건으로 선생은 1년 6개월 동안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갖은 고초를 당했다.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피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출옥 이후 곧 바로 민족의 염원인 사전 편찬 사업에 매진하였다. 이에 따라 선생은 이희승, 정인승 등과 함께 1940년 4월 [한글 맞춤법 통일안] 개정안을 성안하여 발표하였고, 또 그 해 6월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결정에 참여함으로써 조선어 사전 편찬의 준비 작업을 착착 진행하여 갔다. 그러나 선생의 이 같은 한글 사랑과 한글 연구와 보급을 통한 겨레 사랑은 1930년대 후반부터 더욱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정책인 소위 ‘황민화 정책’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되었다. 그것이 이른바 조선어학회사건이었다.

 

불철주야로 사전 편찬 사업에 종사하던 선생을 비롯한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1942년 10월 함경남도 홍원경찰서 형사들에게 피체되었다. 이는 한글의 연구와 보급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조선 독립의 기초를 형성해 가던 조선어학회를 해산시키기 위한 일제의 공작에 의한 것이었다. 즉 일제는 침략전쟁에 우리 민족을 효과적으로 동원하고 아울러 민족말살정책의 완성을 위해 이른바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허울좋은 식민지 지배 정책을 내세웠다. 이 가운데에서도 일제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이 바로 ‘우리말과 글에 대한 사용 금지 및 말살, 그리고 이에 대신하는 일본어 상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어학회의 우리말과 글에 대한 연구와 사전 편찬 작업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 정책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일제는 어떠한 구실을 만들어서라도 조선어학회를 탄압하고자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 그 빌미가 되었던 것이 함흥 영생여학교 4학년 학생인 박영옥의 일기 내용 중의 일부였다. 일제 경찰은 기차 안에서 친구들과 우리말로 대화하다가 발각되어 조사받게 된 박영옥이 2학년 때 쓴 일기 중에서 “국어를 사용하는 자를 처벌했다”는 문구를 찾아내 이를 트집잡기 시작하였다. 이 때의 국어란 일본어로, 일본어를 사용한 자에 벌을 주었다는 것은 반일적인 처사로 그 배후 인물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하여 박영옥 등 영생여학교 학생들을 고문 취조하였다. 그 결과 일제 경찰은 영생여학교 학생들에게 우리말과 글을 사용할 것을 주장하는 등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인물이 조선어학회 사전 편찬 전임 위원이자 그 학교의 전임 교사였던 정태진임을 알아내고, 그를 1942년 9월 5일 함경남도 홍원경찰서로 체포 압송하였다. 여기에서 일경은 온갖 악형과 고문으로 정태진으로부터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자들의 단체이며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백 받았다.

 

 

 

일경의 고문으로 옥중 순국

 

 

일제 경찰은 1942년 10월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조선어학회 주요 인사들을 대거 체포하였으며 선생을 비롯한 33명을 체포하여 조선어학회 회원들과 사전 편찬 후원 회원들 전원을 검거하였다. 그리고 사전 편찬 원고와 수십만 장의 자료 카드를 압수하여 조선어 사전 편찬 사업을 중단시키고 조선어학회를 강제 해산시켰다. 이후 조선어학회 회원들에 대한 1년여의 조사를 통해 “민족운동의 한 가지 형태로서 소위 어문운동은 민족 고유의 어문의 정리, 통일, 보급을 도모하는 하나의 민족운동인 동시에 가장 심모원려(深謀遠慮)를 포함한 민족 독립운동의 점진형태(漸進形態)다”고 하여 치안유지법 제1조의 내란죄를 적용하였다. 이 같은 내란죄를 적용하기 위해 일제 경찰은 조선어학회 관련 인사들에게 소위 ‘육전’ ‘해전’ ‘공중전’이라고 불리는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가하였다.

 

특히 선생에 대한 고문은 더욱 가혹하였다. 그것은 선생이 3·1운동에 참여하였고, 중국에 망명하여 북경대학 사학과를 나온 민족주의 역사학자로서 지상에 한국사와 관련된 글을 지속적으로 발표해 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전 편찬의 실무 책임자로 상해에서 독립운동가인 김두봉을 만났으며, 수양동우회 사건에도 관련되는 등 이른바 ‘전력’이 있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결국 선생은 일제의 고문으로 말미암아 1943년 12월 8일 새벽, 함흥감옥의 차가운 시멘트 독방에서 55세의 나이로 옥사,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약력

 

1919 평북 영변에서 3·1만세운동 참가
1929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 집행위원
1931∼1934 한글강습회 개최, 한글보급
1942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피체
1943 고문으로 옥중 순국

 

 

 

 

출처 : 추억속으로
글쓴이 : 그림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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